고공단보[古公亶父] 고공단보는 주(周)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던 태왕(太王)인데 처음으로 국호를 주(周)로 하였으며, 무왕(武王)의 증조부다. 고공(古公)은 호(號)이고, 단보(亶父)는 이름이다. 적인(狄人)의 난을 피하여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 와서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공단보의 아들이 왕계(王季)이고, 왕계의 아들이 문왕(文王)이다. <詩經 綿>
고공단보[古公亶父] 고공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본호(本號)이고, 단보는 그의 이름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면(綿)에 “고공단보가 아침에 말을 달려와서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 아래에 이르니, 이에 강씨 부인과 함께 와서 집터를 보아 잡았도다.[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라고 하였데, 이 시는 태왕이 처음 빈(邠)에 살다가 적인(狄人)의 침략을 견디다못해 그곳을 떠나 기산(岐山) 아래에 새로 자리를 잡아 살게 된 것을 노래한 것이다.
고공무위[高拱無爲] 두 손을 마주잡고 아무 하는 일이 없어도 천하가 크게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고공빈토[古公邠土] 고공은 주(周)나라의 선조인 고공단보(古公亶父)를 가리킨다. 주나라는 먼 조상인 공유(公劉)가 상(商)나라 때 빈(邠) 지방으로 처음으로 옮겨 왔고, 그 뒤 고공단보가 빈 땅에 있다가 오랑캐의 등쌀에 못 이겨 기산(岐山)에 도읍을 정해 주나라의 기반을 닦았으며, 무왕(武王) 때에 이르러 상나라를 정벌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고공솔정[雇工率丁] 조선 시대에 북방의 변경이 안정되기 전에는 함경도의 거주민들이 모두 변경 수비의 임무를 지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생업에 지장이 있게 되자,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을 고공으로 정해 주어 농사일을 대신하게 하고 토착민 중에 솔정(率丁)을 정해 주어 물품을 공급하게 하였다. 뒤에 변경이 안정된 뒤에도 이러한 풍습이 그대로 남아 고공과 솔정을 노비처럼 부리고 심지어는 10세가 되기 전부터 잡아다 부리고 생사여탈권까지 쥐었다고 한다. 보인은 솔정을 이른다. <顯宗改修實錄 5年 12月 30日>
고공주문[考功奏文] 감사가 수령들의 성적을 적어서 임금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고공지[考工地] 한(漢)나라 관제(官制)에 고공(考工)은 기계를 만드는 관청이다. 무제(武帝)의 외숙 전분(田蚡)이 승상(丞相)으로 있으면서 고공에 속한 땅을 청구하여 집을 넓히려다가 무제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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