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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요[考靈曜]~고영하순[顧榮賀循]~고예[顧倪]~고예[攷藝]


고영[顧榮]  진서(晉書) 권68 고영열전(顧榮列傳)에 “광릉상(廣陵相) 진민(陳敏)이 반란을 일으켜 남하하여 강을 건너려고 하니, 고영을 우장군(右將軍) 단양내사(丹陽內史)로 임명하였다. 고영이 다리를 철거하고 배를 모아 남쪽의 언덕으로 가져다 놓으니, 진민이 만여 명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가 건너지 못하였다. 그때 고영이 깃털로 만든 부채 즉 우선(羽扇)으로 지휘하니, 적병의 무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라고 하였다.

고영요[考靈曜]  한(漢)나라 때에 점성술을 이용하여 유가 경전의 뜻을 풀이한 위서(緯書)인 상서위(尙書緯) 5종 가운데 하나. 상서위 5종은 고영요(考靈曜)·선기검(璇璣鈐)·형덕방(刑德放)·제명험(帝命驗)·운기수(運期授)이다.

고영인[顧寧人]  이름은 염무(炎武), 영인(寧人)은 그의 자(字)이다. 명 나라 곤산(崑山) 사람이다. 저서에는 정림집(亭林集)과 일지록(日知錄)이 있다.

고영하순[顧榮賀循]  고영(顧榮)과 하순(賀循)은 진대(晉代)의 인물로, 모두 오(吳)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여 그 지역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었다. 동진의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가 강동(江東)을 진무(鎭撫)할 때 민심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 두 사람을 초치하여 등용함으로써 강동의 인심을 자신에게로 쏠리게 하였다. <晉書 卷6 元帝本紀>

고예[考禰]  돌아가신 뒤에는 부친을 ‘고(考)’라 부르고, 사당에 신주가 모셔진 뒤에는 ‘예(禰)’라 부른다.

고예[顧倪]  동진(東晉) 때의 문인화가로서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던 고개지(顧愷之)와 원(元) 나라 말기의 문인화가로서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던 예찬(倪瓚)을 합칭한 말이다.

고예[攷藝]  재주를 겨루는 의식을 이른다. 예기(禮記) 연의(燕義)에 “봄에는 학교에서, 가을에는 활 쏘는 곳에 모여서 그 재주를 겨루어 진퇴를 결정했다.[春合諸學 秋合諸射 以考其藝 而進退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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