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고운독거[孤雲獨去]~고운선인[孤雲仙人]~고운야학[孤雲野鶴]


고운[顧雲]  당나라의 시인으로 최치원과 시를 주고받았던 인물이다. 자는 수상(垂象)이며, 또 사룡(士龍)이라고도 한다. 지주(池州) 사람이다. 두순학(杜荀鶴)이나 은문규(殷文圭)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구화산(九華山)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함통(咸通) 15년(874)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변(高駢)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사(從事)하였다. 필사탁(畢師鐸)의 난 이후에는 삽주(霅州)로 물러나 살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건녕(乾寧) 초에 졸하였다. 저서로는 봉책연화편고(鳳策聯華編稿)와 소정잡필(昭亭雜筆)이 있다.

고운[孤雲]  신라의 학자 최치원의 호. 당나라에 유학하여 벼슬했고 자금어대를 받았다. 황소의 난에 고병의 종사관으로 되어, 토황소격문은 천하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귀국했으나 나라가 어지러움을 비관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해인사에 들어가서 생을 마쳤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다. 신라 하대의 학자이자 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6두품 출신인 것으로 보이며, 18세의 나이로 중국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하였다. 879년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복무하면서 지은 격황소서(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히며, 이후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후에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885년에 신라로 돌아와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자신의 뜻을 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으로 떠돌다가 894년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으나 실효를 거둘 수 없음을 알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경주·강주·합주·지리산 등을 떠돌았으며, 만년에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간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나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계원필경> 및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시문 몇 편 등이 전한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고운독거[孤雲獨去]  이백의 경정산(敬亭山) 시에 “뭇 새는 높이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은 홀로 한가로이 가네.[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閒]”라는 구절이 있다.

고운선[孤雲仙]  고운(孤雲)은 최치원(崔致遠)의 호인데, 그가 신선이 되어 갔다는 전설이 있다.

고운선인[孤雲仙人]  고운은 신라 말기의 유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의 호인데, 그가 일찍이 난세(亂世)를 피하여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은거했던 까닭에 그를 유선(儒仙)이라 일컬은 데서 온 말이다.

고운야학[孤雲野鶴]  외롭게 떠 있는 구름과 무리에서 벗어난 학이라는 뜻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한가로이 숨어 사는 선비를 이르는 말이다. ‘고운(孤雲)’과 ‘야학(野鶴)’은 옛사람들이 세속을 벗어난 사물로 인식했다.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