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황[膏肓] 고칠 수 없는 병. 고(膏)는 심하(心下)에 있는 미지(微脂)요. 황(肓)은 격상(膈上)에 있는 박막(薄膜)이다. 좌전(左傳) 성공(成公) 10년조에 “병이 황의 위와 고의 아래 있어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의 꿈에 병마가 더벅머리 두 아이로[二豎] 변해서 고황(膏肓)으로 들어갔는데, 결국은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었다는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成公10年>
고황[膏肓] 고황은 심장과 격막(膈膜) 사이에 있는 부분으로, 여기에 병이 나면 침이나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다는 데서 전하여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을 가리킨다. 춘추 시대 진후(晉侯)의 병이 위독했을 때, 진(秦)나라에 의원을 요청하여 완(緩)이라는 의원이 진(晉)나라로 가던 도중, 진후의 꿈에 질병이 두 아이로 변하여 나타나 그중 한 아이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훌륭한 의원이니, 우리를 괴롭힐까 두렵다. 어디로 도망갈 거나?[彼良醫也 懼傷我 焉逃之]” 하자, 또 다른 한 아이가 말하기를 “횡격막의 위요 심장의 아래에 가 있으면 우리를 어찌하겠느냐.[居肓之上膏之下 若我何]” 하는 꿈을 꾸었는데, 이윽고 진나라의 의원이 와서 진후의 병세를 살펴보고는 말하기를 “이 병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병의 근원이 횡격막의 위에 있고 심장의 아래에 있어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침을 놓아도 닿지 않고, 약을 써도 약 기운이 이르지 못합니다.[疾不可爲也 在肓之上膏之下 攻之不可 達之不及 藥不至焉]”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成公10年>
고황[膏肓] 뱃속 깊은 곳에 있는 장기(臟器)로, 병마가 그곳으로 들어가면 치료할 수 없다고 한다. 전하여 고질병이 든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10년 조에 이르기를 “진 경공(晉景公)이 병이 나서 진백(秦伯)에게 의사를 요청하자 의완에게 치료하라고 했다. 의완이 오기 전에 경공이 꿈을 꾸었는데 두 녀석이 서로 말하기를 ‘저 사람은 양의이니 우리를 해칠까 두렵구나.’라고 하자 한 녀석이, ‘황(肓) 위 고(膏) 아래에 있다면 우리를 어쩔 것인가?’라고 했다. 의완이 와서 경공에게 말하기를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황 위에 있고 고 아래에 있어서, 치료가 미칠 수 없고, 약도 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더니 경공이 ‘양의이다.’라고 하고, 후하게 예를 표하고 돌려보냈다.[公疾病 求醫于秦 秦伯使醫緩爲之 未至 公夢疾爲二竖子 曰 彼良醫也 懼傷我 焉逃之 其一曰 居肓之上 膏之下 若我何 醫至 曰 疾不可爲也 在肓之上 膏之下 攻之不可 達之不及 藥不至焉 不可爲也 公曰 良醫也 厚爲之禮而歸之]”라고 하였다.
고황[膏肓] 인체의 한 부위로서 심격(心膈)의 사이에 있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경공(景公)이 병들어 진(秦)나라의 의사 완(緩)을 청하였다. 경공의 꿈에 병이 두 아이가 되어 말하기를 “명의가 오면 우리를 해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심장 아래[膏]와 가슴 위[肓]에 숨으면 어찌 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다음날 의사가 말하기를 “병이 고황(膏肓)의 사이에 들어갔으니 치료할 수 없다.” 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10年> 인하여 병이 심한 것을 일러 병이 고황에 들어 갔다고 한다. 전하여 자연의 승경(勝景)에 대한 애착심을 표현하는 말로 쓰인다.
고황[顧况] 당 덕종(唐德宗) 때의 시인. 생몰년 미상이다. 자(字)는 포옹(逋翁), 호는 화양진일(華陽眞逸), 자호(字號)를 화양산인(華陽山人)이라 했다. 소주(蘇州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 사람이다. 숙종(肅宗) 때 진사가 되어 저작랑(著作郞) 등을 역임했다.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였다. 저서에는 화평(畵評)·화양집(華陽集)이 있다.
고황독방초[顧况讀芳草] 고황(顧況)이 백낙천의 방초시(芳草詩)를 읽고 감탄하며 “우리의 시문이 그만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자네가 있네그려.[吾謂斯文遂絶 今得子矣]”라고 하였다. 고황(顧況)은 당나라 때의 시인이자 화가이다. ‘방초시’는 부득고원초송별(賦得古原草送別)을 이른다. 당나라 때에는 과거 시험을 보려면 응시생은 반드시 자신을 주시관(主試官)에게 추천하는 현관(顯官)이나 명망 있는 학자의 추천서가 있어야 했다. 응시생들은 이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이 지은 글 중에서 훌륭한 작품을 골라 권축(卷軸)에 정서하여 보냈는데, 이것을 행권(行卷)이라고 한다. 때로는 이러한 권축을 행권이라고도 한다. 백거이 역시 처음 서울에 와서 과거 시험에 응시할 때 당시 유명했던 고황에게 이 방초시로 행권하였는데, 고황은 백거이의 행권을 받고 처음에는 그의 이름인 ‘거(居)’와 ‘이(易)’를 가지고 놀리며 “장안의 곡식 값은 비싸니 여기에서 살기가[居]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걸세[不易].”라고 하였다가, 백거이의 방초시 중 “들불로도 다 태우지 못하여 봄바람에 다시 살아나네.[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라는 구절을 보고는 탄복하며 앞서 한 말은 농담이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한다. <古今事文類聚 別集 卷26 人事部 投贄 先慢後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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