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락[鞏洛] 공현(鞏縣)의 낙수(洛水). 공현(鞏縣)은 지금의 중국 하남성 영양현(榮陽縣) 서부의 낙수(洛水) 동안(東岸)에 있었는데, 안녹산 반란 때에 당 나라 군사가 이곳에서 패했으므로 황제가 서울을 버리고 달아났다.
공락[共樂] 같이 즐김. 다른 사람과 함께 즐김.
공래관[邛崍關] 사천성(四川省) 형경현(滎經縣) 서쪽의 공래산(邛崍山)에 있는 관문이다. 줄여서 공관(邛關)이라고도 한다. 당 의종(唐懿宗) 함통(咸通) 11년(870) 1월에 남조(南詔) 추룡(酋龍)이 공래관으로 군대를 보내 침입했다는 기록과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874)에 고변이 추장 50인을 붙잡아 목을 베고 공래관을 수복하니 남조(南詔)가 달아났다는 기록이 전한다. <新唐書 卷222中 南蠻列傳中 南詔下>
공래구절판[邛郲九折阪] 공래산(邛郲山)의 구절판(九折阪). 한(漢) 나라 왕양(王陽)이 익주자사(益州刺史)로 부임할 때 사천성(四川省) 공래산(邛郲山)의 구절판(九折阪)을 넘으면서 그 험준한 산길을 보고 “선인(先人)의 유체(遺體)를 받든 몸으로 어떻게 자주 이 길을 왕래하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는데, 그 뒤에 왕존(王尊)이 익주자사가 되어 그 길을 넘을 때에는 빨리 가라고 마부를 재촉하며 “왕양은 효자이지만 나는 충신이다.”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漢書 卷76>
공래설산중[公來雪山重] 누가 옴으로 인하여 그곳의 무게를 더하였다는 말로, 상대의 인격이나 덕망을 극히 찬양하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증좌복야정국공엄공무(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 시의 “공이 오자 설산이 무거워지더니, 공이 가니 설산이 가벼워졌지.[公來雪山重 公去雪山輕]”이란 대목에서 유래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