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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고신[空名告身]~공명둔전[孔明屯田]~공명부탁[孔明付託]


공명고[公明高]  증자(曾子)의 제자이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 1장에 나온다.

공명고신[空名告身]  임명되는 자의 이름 쓸 곳을 공란으로 두고 직책만 기록한 고신첩(告身帖)으로 공명첩(空名帖)이라고도 한다. 고신첩(告身帖)은 벼슬아치에게 주는 사령상(辭令狀)이다.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은 국가의 재정이 궁핍할 때 국고(國庫)를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관원이 이것을 가지고 돈이나 곡식을 바치는 사람에게 즉석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어 명목상의 관직을 주었다.

공명고신[空名告身]  임명되는 자의 이름을 비워 발행하는 고신을 말한다. 고신은 벼슬아치로 임명되는 사람에게 주는 사령장(辭令狀)인데, 4품(品) 이상은 교지(敎旨)로, 그 이하는 이조(吏曹)의 봉교(奉敎)로 하였다. 공명고신은 나라에 재용(財用)이 부족하거나 상을 줄 때 관직명만 적고 이름은 비워둔 채 발행하였다.

공명도노[孔明渡瀘]  제갈량(諸葛亮)이 노수(瀘水)를 건너서 남만(南蠻)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공명둔전[孔明屯田]  공명은 제갈량(諸葛亮)의 자(字)이다. 제갈량이 항상 군량이 계속 조달되지 못하는 탓으로 위(魏)나라 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군사를 나눠 둔전(屯田)을 하면서 오래 주둔할 계책을 세우고는 오장원(五丈原)에서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였는데, 그때 군사들이 주민 사이에 섞여 살았지만 사사로이 침해하는 일이 없어서 백성들 모두가 안도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지(三國志) 권35 촉서(蜀書) 제갈량(諸葛亮)에 나온다. 제갈량은 이곳 오장원에서 사마의와 대치한 지 100여 일 뒤에 54세의 나이로 군중(軍中)에서 병사(病死)하여 정군산(定軍山)에 묻힌다.

공명룡[孔明龍]  공명(孔明)은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의 자이고, 용(龍)은 곧 그의 친구 서서(徐庶)가 그를 유비(劉備)에게 천거하면서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와룡(臥龍)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제갈량은 특히 한실(漢室)을 흥복(興復)시키기 위해 평생을 노심초사하다가 생을 마친 충신이었다.

공명묘[孔明廟]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사당을 지칭하는 것으로,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 팔진대(八陳臺) 아래에 있다.

공명부탁[孔明付託]  공명은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의 자인데, 촉한의 선제(先帝) 유비(劉備)가 병이 위독했을 때 제갈량을 불러 놓고 후사(後事)를 부탁하여 이르기를 “군(君)의 재주는 조비(曹丕)의 10배나 되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마침내 대사(大事)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사자(嗣子)가 보필할 만하면 보필해 주고, 자격이 되지 못하거든 군(君)이 스스로 취할지어다.”라고 했던 것을 이른 말이다. <三國志 卷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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