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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선[公明宣]~공명수죽백[功名垂竹帛]~공명쌍표[孔明雙表]


공명선[公明宣]  공명선은 증자(曾子)의 제자로, 그의 문하에서 삼 년이나 있으면서도 글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그 까닭을 묻자, 공명선은 스승인 증자의 모범적인 행동을 보고 따라 배우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답했으므로, 증자가 감복(感服)했다고 한다. <說苑 反質>

공명선[公明宣]  공명선은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증자(曾子)의 제자이다. 공명선이 증자에게 와서 학문을 배웠는데 3년 동안 글 한 자 보지 않자, 증자가 그에게 학문을 배우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공명선이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선생님의 평소 생활을 보았는데, 부모님이 계시면 개나 말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고, 빈객을 접대할 때는 공경을 다하였고, 관직에서는 아랫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이 모습을 보고 열심히 배우려 하고 있습니다만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찌 감히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의 문하에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小學集註 稽古>

공명수록[公明壽祿]  공명은 송(宋) 나라 이간지(李柬之)의 자(字)이다. 문정공(文定公) 이적(李迪)의 아들로 부필(富弼)에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며, 인종(仁宗), 영종(英宗), 신종(神宗) 3대에 걸쳐 지극한 은총을 받고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치사(致仕)한 뒤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宋史 卷310>

공명수죽백[功名垂竹帛]  공적과 이름을 대나무와 비단에 드리운다. 공적을 세워 이름을 후세에 남긴다는 말이다. 죽백(竹帛)은 대나무와 비단이다. 옛날에는 기록을 대나무나 비단에 했으므로 죽백이라는 말은 곧 기록이나 역사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말은 공을 세워 이름을 역사에 남긴다는 뜻을 담고 있다. 광무제가 후한을 세우는 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開國功臣)인 등우(鄧禹)가 소년 시절에 장안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유수(劉秀)도 장안(長安)으로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등우는 유수를 만나자마자 그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사귀게 되었다. 왕망(王莽)이 신(新)을 세운 뒤에 몹시 흔들리자 한(漢)나라 후예(後裔)로 반란군 대장에 유현(劉玄)이 추대되어 갱시제(更始帝)가 되었는데 등우가 천거(薦擧)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유수가 황하 이북 땅을 평정(平定)하러 떠났다는 말이 들려오자 등우는 즉시 황하(黃河)를 건너가 업(鄴)이라는 곳에서 유수를 만났다. 유수가 자신을 따르고 섬기는 이유를 묻자 “다만 명공(明公)의 위덕(威德)이 사해(四海)에 더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얼마 안 되는 힘이나마 바쳐 공명을 죽백에 드리울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유수는 후에 광무제(光武帝)가 되었고 등우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어서 뜻대로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등우전(鄧禹傳)> 명수죽백(名垂竹帛). 명전천추(名傳千秋).

공명쌍표[孔明雙表]  공명은 촉 나라 제갈량(諸葛亮)의 자이며, 두 표문[雙表]은 전출사표(前出師表)와 후출사표(後出師表)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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