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문거[孔文擧] 문거는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 공융(孔融)의 자인데, 공융은 준재(俊才)로서 매우 박식(博識)하였고, 특히 조정에서의 건의(建議)에 뛰어났었다.
공문거[孔文擧] 문거는 후한(後漢) 때의 명사 공융(孔融)의 자(字)이다. 그는 요동(遼東)으로 피난하여 북해(北海)에 살면서 시주(詩酒)로 세상을 보냈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좌상에는 언제나 손이 가득하고 술동이엔 언제나 술이 가득하면 나는 아무런 근심이 없다.”고 하였다. <三國志 魏志 孔融傳>
공문거[孔文擧] 후한(後漢) 노국(魯國) 사람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자가 문거이다. 벼슬은 헌제(獻帝) 때 북해상(北海相)이 되고 뒤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올랐다. 저서에 공북해집(孔北海集)이 있다. <後漢書 卷70 孔融列傳>
공문명달증[工文命達憎] 문장을 잘한 사람은 흔히 운명이 기박하다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천말회이백(天末懷李白) 시에 “문장은 운명의 현달함을 증오하고, 악귀는 사람의 탈 잡기를 좋아하네.[文章憎命達 魑魅喜人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7>
공문무우[孔門舞雩]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각 뜻을 물었더니, 다른 이는 모두 자기의 능력과 포부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말하였는데, 증점(曾點)은 홀로 “모춘(暮春)에 춘복(春服)을 새로 입고 관자(冠者) 5, 6인과 동자(童子) 6, 7인을 거느리고,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고 읊으며 돌아오리다.”라 하니, 공자가 탄식하며 “나는 점(點)을 허여한다.”라고 하였다.
공문사과[孔門四科]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공자(孔子)의 제자들을 소장(所長)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하여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와 중궁(仲弓)이고,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와 자공(子貢)이고,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와 계로(季路)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이다.”라고 하였는데, 후세에 이를 공문사과(孔門四科)라고 하였다.
공문사과[孔門四科] 중국 춘추 시대의 공자(孔子)의 문하생인 십철(十哲)을 그 장점에 따라 분류하는 4가지 항목이다. 즉 덕행(德行), 언어(言語), 정사(政事), 문학(文學)을 말한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덕행에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遊)·자하(子夏)’라 하여 공자 문하생 70명 중 중심을 이룬 제자 10명을 그 장점에 따라 4분류하고 있다. 이것을 후세에 ‘사과십철(四科十哲)’이라 하였다. 덕행이란 모든 행위가 바른 것, 언어란 제후 간(諸侯間)의 응대 수사(修辭)에 뛰어난 것, 정사란 치국(治國)에 재능이 있는 것, 문학이란 고전에 정통한 것이다. 이것을 사과라고 한 것은 후한(後漢) 때의 논형(論衡) 문공편(問孔篇)과 후한서(後漢書) 정현열전(鄭玄列傳)에서 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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