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벽[拱璧] 두 손으로 감싸 잡을 만큼 큰 벽옥(璧玉)으로, 더없이 진귀한 보배를 뜻한다.
공벽[拱璧] 두 손으로 안을 정도로 아주 커다란 보옥(寶玉)을 말하는데, 극히 진귀한 물건을 비유할 때 널리 쓰인다.
공벽[孔壁]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고문상서(古文尙書)라는 것이 공자(孔子)의 집 벽 속에서 나왔다. 무제(武帝) 말에 노 공왕(魯恭王)이 공자의 집을 무너뜨리고 그 궁궐을 넓히려고 하다가 고문상서(古文尙書) 및 예기(禮記)·논어(論語)·효경(孝經)을 발견했는데 무릇 수십 편이 모두 고자(古字)였다. 공왕이 그 집에 들어가니 금슬(琴瑟)과 종경(鐘磬)의 소리가 들려오므로 이에 두려워서 마침내 중지하고 무너뜨리지 않았다.” 하였고, 그 주에 “가어(家語)에 이르기를 ‘공등(孔騰)의 자는 자양(子襄)인데 진(秦) 나라 법이 준급(峻急)함을 두려워하여 상서·효경·논어를 공자 옛집의 벽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하였다.” 하였고, 한기(漢記) 윤민전(尹敏傳)에 이르기를 “공부(孔鮒)의 소장이다. 사주(史籒)란 자는 주(周) 나라 때 사관(史官)인데 학동(學童)을 가르치는 자이다. 공자 벽 속의 고문(古文)과는 체(體)가 다르다.”고 하였다
공벽과두[孔壁科斗] 한(漢) 나라 경제(景帝) 때 노 공왕(魯恭王)이 집을 확장하는 공사를 하는 중에 공자의 구택(舊宅)을 허물자 벽 속에서 상서(尙書)와 논어(論語)와 효경(孝經) 등이 나왔는데, 모두 선진(先秦)의 과두문자(蝌蚪文字)로 기록되어 있었다 한다.
공벽본[孔壁本] 한(漢) 나라 때 공자 구택(舊宅)의 벽(壁) 속에서 발견한 고문(古文)으로 된 상서(尙書)를 이른다. 앞서 진(秦) 나라 때에 공자의 9세손인 공부(孔鮒)가 진법(秦法)의 혹독함을 두려워하여 공자의 옛집 벽 속에다 고문으로 된 상서(尙書)·효경(孝經)·논어(論語) 등의 서적을 숨겨 놓았었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에 노 공왕(魯恭王) 유여(劉餘)가 궁실(宮室) 치장하기를 좋아한 나머지 궁실을 넓히기 위하여 공자의 구택을 헐다가 이 서적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漢書 藝文志>
공벽상서[孔壁尙書] 공자(孔子) 고택(古宅)의 벽에서 나왔다는 상서(尙書)를 이른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고문상서(古文尙書)는 공자의 집 벽 속에서 나왔다. 무제(武帝) 말년에 노 공왕(魯恭王)이 공자의 집을 무너뜨리고 그 궁(宮)을 넓히다가 고문상서를 얻었다.”고 하였다.
공벽서[孔壁書] 한(漢)나라 때 노 공왕(魯恭王)이 궁(宮)을 넓히기 위하여 공자(孔子)의 구택(舊宅)을 헐다가 그 벽(壁) 속에서 얻은 고문상서(古文尙書), 예기(禮記),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을 가리킨다.
공벽원훈[孔壁元勳] 공벽에서 나온 고문상서 등을 바르게 논증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한 무제(漢武帝) 말엽에 노 공왕(魯共王)이 공자의 구택(舊宅)의 벽[孔壁]에서 고문(古文)의 경전(經傳). 즉, 고문상서(古文尙書)·예기(禮記)·논어(論語)·효경(孝經)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공벽유서[孔壁遺書] 한(漢) 나라 때 노 공왕(魯恭王)이 궁(宮)을 넓히기 위하여 공자(孔子)의 구택(舊宅)을 헐다가 그 벽(壁) 속에서 얻은 고문상서(古文尙書)·예기(禮記)·논어(論語)·효경(孝經)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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