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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분[公憤]~공분지고[孔奮之膏]~공비거억[功費巨億]


공분[公憤]  공적(公的)인 일로 느끼는 분노. 공중(公衆)이 다 같이 느끼는 분노.

공분[孔奮]  동한(東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사람으로, 효도하고 청렴하기로 이름났다. 고장(故藏)의 수령으로 4년 동안 재직하며 청렴결백하게 지내다가, 두융(竇融)을 따라 황제에게 조회할 때에 다른 수령들은 재물 실은 수레가 잇달았지만 공분만은 빈 수레 하나로 길에 오르니, 황제가 상을 내렸다고 한다.

공분[孔奮]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군어(君魚)이다. 유흠(劉歆)에게 배웠고, 고장장(姑藏長)으로 있을 적에 청렴하였다. 뒤에 농서(隴西)의 적 외무(隗茂) 등을 멸망하였는데, 그 공으로 무도태수(武都太守)가 되었다. 청렴하고 공평하였다. <後漢書 卷31 孔奮列傳>

공분[孔奮]  후한(後漢) 공분(孔奮)이 무도(武都) 군승(郡丞)이 되어 농서(隴西)의 적 외무(隗茂) 등을 토벌할 때 적이 그 처자를 잡아 군전(軍前)에 두고 공분을 퇴각하라 하였으나 더욱 공격하여 적을 사로잡았다.

공분지고[孔奮之膏]  관직 생활이 청렴결백하였다는 말이다. 동한(東漢)의 공분이 고장(姑臧)이라는 부유한 고을에 4년 동안 수령으로 있으면서 재물을 탐내지 않고 청렴한 자세로 일관하자, 당시 사람들이 “기름 덩어리 속에 놔두었건만 제 몸 하나도 윤택하게 하지 못한다.[置脂膏中 亦不能自潤]”라고 조롱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東觀漢記 孔奮傳>

공불이[公不易]  청국(淸國) 군대가 다가와 마부대(馬夫大)가 선봉장으로 서교(西郊)에 왔을 때 최명길이 나가서 그와 얘기하며 그들 진격을 조금 늦췄던 바람에 주상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여 후인들이 그 일을 두고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공비거억[功費巨億]  공력과 비용이 억(億)으로 헤아릴 정도로 많이 허비됨을 이른다.

공빈[恭嬪]  광해군(光海君)의 생모로 성은 김씨(金氏)인데, 선조(宣祖) 10년에 죽어서, 풍양현 적성동(赤城洞)에 있는 조맹의 무덤 뒤쪽 30보쯤 되는 곳에 장지를 정하였다. 그 뒤 광해군 2년에 공빈을 추숭(追崇)하여 공성왕후(恭聖王后)라 하고 그 무덤을 성릉(成陵)이라고 칭하였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그 휘호(徽號)가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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