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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저구[公孫杵臼]~공손지검[公孫之劍]~공손포피[公孫布被]


공손자[公孫子]  공손홍(公孫弘)을 말한다.

공손저구[公孫杵臼]  춘추(春秋) 시대 진 경공(晉景公)의 영신(佞臣) 도안가(屠岸賈)가 세경(世卿)인 조삭(趙朔)의 온 가족을 다 죽이고, 또 조씨(趙氏)의 유복고아(遺腹孤兒)까지 찾으려고 하자, 조씨의 문객(門客)인 공손저구(公孫杵臼)가 조삭의 친구인 정영(程嬰)과 더불어 조삭의 외로운 아들을 살리자고 모의하여, 정영에게는 조삭의 진짜 아들을 안고 산중에 도피하여 화를 면하게 하고, 공손저구 자신은 다른 사람의 영아(嬰兒)를 데리고 거짓 조삭의 아이라고 위장하여 산중에 숨어 있으면서 정영에게 자신을 도안가에게 밀고(密告)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손저구 자신은 다른 사람의 아이와 함께 도안가에게 잡혀 살해당하고, 조삭의 진짜 아이는 정영에 의해 무난히 목숨을 보전하여 멸문(滅門)의 화를 면하게 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43 趙世家>

공손제[公孫帝]  공손술(公孫述)을 이른다. 그가 촉군(蜀郡) 태수로 있을 때 하루는 꿈을 꾸니 “공손씨가 12년간 임금 노릇 할 것이다.” 하였고, 또 마침 용이 그 관아로부터 나오는데 밤중임에도 광채가 찬란하자, 그 역시 상서로운 징조라 생각하여 자기 손바닥에 공손제(公孫帝)라 새기고는 후한 건무(建武) 원년(25) 4월에 드디어 자립해서 천자라 칭했다가 바로 패망하였다.

공손지[公孫枝]  당진(唐晉) 공실의 먼 친척으로 섬진(陝秦) 공자집(公子縶)의 추천을 받아 섬진의 목공에게 출사했다. 자(字)는 자상(子桑)이다. 백리해(白里亥)를 목공에게 천거하였고 후에 백리해의 뒤를 이어 섬진의 재상을 지낸 사람이다.

공손지검[公孫之劍]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 남의 훌륭한 솜씨를 보면 자기 분야의 기량도 그에 준하여 발전함을 이른다. 당(唐)의 교방(敎坊) 기생 공손대랑(公孫大娘)의 칼춤이 일품이었는데, 장욱(張旭)이 그 칼춤 구경을 하고 나서 그 춤추는 기법을 글씨에다 적용하여 초서(草書)가 더 늘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名畵記>

공손지포피[公孫之布被]  한 무제(漢武帝)의 승상(丞相)인 평진후(平津侯) 공손홍(公孫弘)이 신자(臣子)의 병통은 절검(節儉)하지 않는 데에 있다면서, 평민처럼 베옷[布被]을 입고 지낸 고사가 있다. <史記 卷112 平津侯列傳>

공손찬[公孫瓚]  공손찬(公孫瓚)은 후한(後漢) 말기 혼란기에 발해(勃海) 일대에 할거한 군벌(軍閥)이다. 후한(後漢) 헌제(獻帝) 초평(初平) 2년(191)년에 청주(靑州)의 황건적(黃巾賊)이 발해(勃海) 지방을 침략하자, 공손찬(公孫瓚)이 동광(東光)에서 이들과 싸워 대파하였다. 동광(東光)은 하북성(河北省) 창주현(滄州縣) 서남쪽에 있다. <後漢書 권9 孝獻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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