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工倕] 요(堯)임금 시대의 명공(名工). 당요(唐堯) 시대의 교장(巧匠)이다. 솜씨가 뛰어난 장인(匠人)으로서, 춘추 시대의 공수반(公輸班)과 함께 교묘한 솜씨를 지닌 기술자의 대명사로 병칭된다.
공수[工倕] 수(倕)는 옛날 기술이 뛰어난 장인의 이름이다. 요(堯) 임금 때 부름을 받아 백공(百工)을 맡아 다스렸기 때문에 공수라고 한 것이다.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공수가 손으로 만져 보고 초과할 것 같으면 자를 대어 그리는데, 손가락과 사용하는 재목이 하나로 합치되므로 마음을 써서 헤아릴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공수[共倕] 순(舜) 임금 때 공공(共工)의 관직을 맡았던 인물로 솜씨가 좋은 사람이다.
공수[贛水] 공수(灨水)로,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파양호(鄱陽湖)로 흘러들어가는 물을 말한다. 두 개의 근원이 있는데, 서쪽 수원(水源)에서 나와 강서성 숭의현(崇義縣)으로 흐르는 것을 장수(章水)라고 하고, 동쪽 수원에서 나와 복건성 장정현(長汀縣)으로 흐르는 것을 공수(貢水)라 하는데, 이 두 물이 산서성(山西省) 공현(灨縣)에서 합쳐져 공수(灨水)가 된다.
공수[公輸] 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 사람인데, 성은 공수(公輸)이고 이름은 반(班)이다. 일설에는 반(般)이라고도 한다. 나무를 잘 다루는 양장(良匠)이다.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篇)에 “공수자(公輸子)의 교(巧)라.”고 하였다.
공수[公輸] 공수반(公輸般). 공수는 고대 유명한 목장(木匠)으로 성이 공수(公輸)이고 이름은 반(般)이다. 사기(史記) 권74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공수반이 송(宋)나라를 공격할 때 아홉 번 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설치하였으나 묵자(墨子)가 아홉 번 막아 냈다.”라고 하였다.
공수[拱手] 공수는 두 손을 포개서 공손히 잡는 것으로, 오른손을 밖으로 포개는 것은 흉례(凶禮) 때의 자세이고 왼손을 밖으로 포개는 것은 길례(吉禮) 때의 자세이다.
공수[龔遂] 공수는 한(漢)나라 때 남평양(南平陽) 사람으로 자는 소경(少卿)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간쟁(諫爭) 잘하기로 유명하고 벼슬은 수형도위(水衡都尉)에까지 이르렀는데 특히 발해 태수(勃海太守)로 있을 때에는 백성들에게 패검(佩劒)을 팔아 소[牛]를 사서 농업에 힘쓰도록 권유함으로써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漢書 卷89>
공수[龔遂] 공수와 황패(黃霸)는 한대(漢代)의 법을 잘 지키며 직무를 열심히 수행한 관리로 손꼽히는 사람들이다. 공수는 산양(山陽) 남평양(南平陽) 사람으로, 발해의 태수가 되었을 때에 흉년이 들자 군(郡)에 가서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니, 백성들이 모두 칼을 팔아 소와 송아지를 사 도움으로써 온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황패는 회양(淮陽) 양하(陽下) 사람으로, 하남 태수승(河南太守丞)이 되었을 때 다른 관리들은 엄혹(嚴酷)하였는데 그만 너그러웠다. 그 후에 영천 태수(潁川太守)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어서도 잘 다스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수[龔遂] 지방 장관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치민(治民) 제일로 꼽혔던 한(漢)나라의 순리(循吏)이다. 발해군(渤海郡)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자주 일어나자, 선제(宣帝)가 그를 불러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삼고는 그 대책을 물었다. 이에 공수가 관대한 정책을 건의하며 일체 편의종사(便宜從事)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윤허를 받은 뒤에, 단거(單車)로 혼자 가서 관아에 이르니 온 경내가 반가이 맞으면서 도적들 역시 모두 해산했다고 한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
공수[龔遂] 한나라 공수(龔遂)가 지방관이 되어 백성 중에 도검을 가지고 다니는 자가 있으면 팔아서 소와 송아지를 사도록 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소를 묶고 송아지를 차고 다니는가.”라고 하였다. 결국 백성이 풍족해지고 풍속이 돈후해졌으며 옥송(獄訟)이 그쳤다고 한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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