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숙[公叔] 한(韓)나라 대부. 한공숙(韓公叔)을 이른다.
공숙[公叔] 한양왕(韓襄王) 때 공중치(公仲侈)와 함께 한나라의 국정을 이끌었던 한나라 귀족 출신의 중신이다. 양왕(襄王) 12년 태자 백영(伯嬰)이 죽자 공자 구(咎)와 공자 기슬(虮蝨)이 왕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이윽고 양왕이 죽자 위(魏)의 지원을 받은 구(咎)가 제(齊)의 지원을 받은 기슬을 물리치고 양왕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한리왕(韓釐王)이다.
공숙단[共叔段] 공(共)은 시호(諡號)이고 숙(叔)은 형제의 차서이며 단(段)은 이름이다. 춘추시대 정(鄭)나라 무공(武公)의 아들이고, 장공(莊公)의 동생이다. 단(段)이 공(共)으로 도망하였기 때문에 공숙(共叔)이라고 하였다 한다. 숙단은 자신의 형 정장공(鄭庄公)이 즉위하자, 어머니 무강(武姜)과 내통하여 반역을 꾀하였으나, 장공이 이들의 계획을 알고 공숙단의 군대를 격퇴하니 패하여 공(共)이라는 고을로 도망갔다. 당시, 정나라 밖에서는 숙단을 공숙단(共叔段)이라고 불렀고 그의 자손들은 ‘단(段)’, ‘공숙(共叔)’, 또는 ‘공(共)’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공숙좌[公叔座]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위혜왕 10년인 기원전 361년에 죽었다. 성은 희(姬)이고 씨는 위(魏)이고 이름은 좌(痤)이다. 위나라 공족 출신으로 위무후(魏武侯) 때 전문(田文)의 뒤를 이어 위나라 재상이 되었다. 왕착(王錯)과 함께 오기를 모함하여 오기가 초나라로 달아나게 했다. 위혜왕 8년 그는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회수(澮水) 북안에서 한(韓), 조(趙) 두 나라의 연합군을 대파하고 조나라 땅으로 진공하여 피뢰(皮牢)의 땅을 점령했다. 같은 해 진나라가 위나라 땅인 소량(少梁)을 공격해 오자 공손좌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여 싸웠으나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후에 진나라로부터 석방되어 돌아와 위나라의 재상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공숙죽소[公叔竹所] 공숙은 남송(南宋) 때 오송년(吳松年)의 자이다. 동시대의 문인 양만리(楊萬里)가 지은 죽소기(竹所記)에, 영가(永嘉)의 오공숙이 죽소를 만들고 양만리에게 기문을 청한 내용이 실려 있다.
공순[孔循] 후당(後唐) 명종(明宗) 때 동도(東都)의 유수(留守) 공순(孔循)이 누룩 제조를 금지하는 법을 어긴 백성의 집안을 멸족하자, 이 말을 들은 명종이 그 억울함을 알고서 이 법을 폐지하여 일반 백성들도 누룩을 만들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新五代史 卷43 雜傳5 孔循>
공순[孔循] 후당(後唐) 사람으로 그의 가세(家世)는 전해지지 않는다. 양 태조(梁太祖) 때 부사(副使)가 되어 장현휘(蔣玄暉)와 함께 소종(昭宗)을 살해하고 양(梁)에 들어와 성명을 고쳤다. 뒤에 횡해절도사(横海節度使)로 죽었다. <五代史 卷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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