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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승걸해[龔勝乞骸]~공승사절[龔勝死節]~공승폐호[龔勝閉戶]


공승[龔勝]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신미(辛未) 신망(新莽) 시건국(始建國) 3년에 “왕망(王莽)이 공승(龔勝)을 맞이하여 태자사우좨주로 삼으니 공승이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莽迎龔勝爲太子師友祭酒 勝不食而卒]”라 하였다.

공승[龔勝]  공승은 원래 한(漢)나라 사람인데, 어릴적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경(經)에 밝아 애제(哀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까지 되었다. 그 후 왕망(王莽)이 찬위(簒位)하여, 강학좨주(講學祭酒)·태자사우(太子師友) 등의 벼슬로 공승을 불렀으나 승은 병을 이유로 불응해왔는데, 왕망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더 융숭한 예로 승을 부르고 놔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기의 사의가 관철되지 못할 것을 안 공승은 자기의 두 아들과 문인 고휘(高暉) 등을 불러 간략하게 치상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는 그 길로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14일 만에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때 수백 명의 조객 중에 어느 늙은이가 들어와 슬피 통곡하고는 “아 슬프다, 향은 향기로 인하여 자신을 불태우고 기름은 밝은 빛을 내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을 소멸한다. 공승이 결국 천명대로 살지 못하였으니,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라 말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한다. <漢書 卷72 兩龔傳>

공승걸해[龔勝乞骸]  한 애제(漢哀帝) 때에 유흠(劉歆)이 종래의 학통(學統)과 다른 좌씨춘추(左氏春秋)·모시(毛詩) 등에 학관(學官)을 세우려고 하자, 제유(諸儒)들이 분노하여 비난이 분분하므로, 유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게 글을 보내 꾸짖었다. 그러자 당시 명유(名儒)였던 공승(龔勝)이 유흠의 절실한 말에 충격을 입어 깊이 스스로 죄책을 느끼고 마침내 벼슬을 사퇴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36>

공승사절[龔勝死節]  절의(節義)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승(龔勝)은 왕망(王莽)에게 부름을 받았으나 그의 불의(不義)함을 보고는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서(漢書) 권72 양공전(兩龔傳)에 “왕망(王莽)이 한(漢)나라를 찬탈한 뒤 공승을 부르자 공승이 두 성씨를 섬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굶어 죽었다. 어떤 부로(父老)가 찾아와서 매우 슬프게 곡하고 나서 말하기를 ‘아, 향은 향기로 인하여 자신을 불태우고 기름은 밝은 빛을 내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을 소멸한다. 공승이 결국 천명대로 살지 못하였으니,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 하고 종종걸음으로 나가 버렸는데, 어떤 사람인 줄 알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공승불굴(龔勝不屈). 공승치사신(龔勝恥事新).

공승이의거[孔丞二宜去]  공승(孔丞)은 당 목종(唐穆宗) 때 상서좌승(尙書左丞)을 지낸 문신(文臣) 공규(孔戣)를 가리키는데, 목종이 외직(外職)에 있던 공규를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불러들인 다음, 좌승으로 임명하였으나, 공규가 늙었다는 이유로 굳이 사직을 청하였다. 평소 그와 친밀했던 한유(韓愈)가 그에게 말하기를 “공은 아직 건강하고, 상께서 세 번이나 공을 만류했는데도 왜 꼭 떠나려고 합니까?[公尙壯 上三留 何去之果]”라고 하니, 공규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임금에게 특별한 대우를 바라는 자이겠습니까. 내 나이 많은 것이 한 가지 마땅히 떠나야 할 조건이요, 내가 좌승으로 있으면서 낭관을 진퇴시키지 못한 것이 두 가지 마땅히 떠나야 할 조건입니다.[吾豈要君者 吾年 一宜去 吾爲左丞 不能進退郞官 二宜去]”라고 하므로, 한유가 다시 말하기를 “공은 남겨 둔 자산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돌아간단 말입니까.[公無留資 何恃而歸]”라고 하자, 말하기를 “내가 두 가지 마땅히 떠나야 할 조건을 짊어졌는데, 그러고도 어찌 당신의 말을 고려할 여지가 있겠소.[吾負二宜去 尙奚顧子言]”라 하고, 그길로 끝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데서 온 말이다. <新唐書 卷163 孔戣列傳>

공승폐호[龔勝閉戶]  공승(龔勝)은 원래 한(漢)나라 사람인데, 소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경(經)에 밝아 애제(哀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까지 되었다. 그 후 왕망(王莽)이 찬위(簒位)하여, 그를 강학좨주(講學祭酒)·태자사우(太子師友) 등의 벼슬로 불렀으나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왕망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더 융숭한 예로 부르자 자기의 사의가 관철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문인 고휘(高暉) 등을 불러 간략하게 치상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는 그 길로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14일 만에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漢書 卷72 兩龔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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