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空籍] 공적(空籍)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확인할 수 없는 과거의 공적은 인정받기 힘들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36 진기세가(陳杞世家)에 “혜공이 즉위하자 애공이 죽은 해로 소급하여 그해를 원년으로 삼았다. 5년 동안 기록이 빠졌다.[惠公立 探續哀公卒時年而爲元 空籍五歲矣]”라고 하였다.
공적허무[空寂虛無] 공적(空寂)은 불가(佛家)의 용어로, 만물이 독자적인 실체도 없고 생멸(生滅)도 없음을 뜻한다. 허무(虛無)는 도가(道家)의 용어로, 도(道)의 본체(本體)는 허무(虛無)하기 때문에 만물을 포용할 수 있고 성(性)은 도(道)에 합하기 때문에 있으면서도 없는 듯하고 채워져 있으면서도 비어 있는 듯함을 뜻한다.
공전[共傳] ‘서로 술잔을 권하다’, ‘서로 술잔을 들다.’라는 말이다. 사공서(司空曙)의 시(詩) ‘운양관에서 한신과 묵고 이별하다(雲陽館 與韓紳宿別)’에 “내일 아침이면 또 恨하리니 안타까운 이별주 함께 드세나[更有明朝恨 離杯惜共傳]”라는 구절이 있다. <唐詩三百首>
공전[孔傳] 공안국(孔安國)이 고문상서(古文尙書)에 전(傳)을 낸 고문상서전(古文尙書傳)을 가리킨다.
공전[公田] 소유권과 수조권(收租權)을 모두 국가에서 가지고 있는 논밭을 이른다. 고대 중국의 정전제(井田制)는 토지의 한 구역을 ‘정(井)’ 자로 9등분하여 8호의 농가가 각각 한 구역씩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한 구역은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국가에 조세로 바치는 토지제도였는데, 그 가운데 토지가 바로 공전(公田)이다.
공전[公田] 공가(公家)의 밭이다. 중국 고대의 정전법(井田法)에 있어 방리(方里)를 정(井)자로 구획하여 한 구역의 정(井)이 900묘가 되는데, 가운데 100묘가 공전(公田)이 되었다. 8호가 각각 100묘씩 나누어 사전(私田)으로 경작하고 8호가 힘을 모아 공전을 경작하게 하였다.
공전[公田] 상고(上古) 시대의 정전(井田) 제도에 의하여 상고하건대, 사방 1리(里)의 땅을 정(井) 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하여, 한가운데 100묘(畝)는 공전이라 하여 여덟 농가가 공동으로 경작해서 조세(租稅)로 바치고, 주위의 800묘는 사전이라 하여 여덟 농가가 각각 100묘씩 나눠 받아 경작하였다. 시경(詩經) 대전(大田)에 “우리 공전에 비를 내리고, 마침내 내 사전에도 내리누나.[雨我公田, 遂及我私.]”라고 하였다.
공전사전[公田私田] 공전(公田)은 농사를 지어 그 소출을 국가에 바치는 토지이고, 사전(私田)은 백성들이 경작하여 먹는 토지를 이른다. 옛날 정전(井田) 제도는 9백 묘(畝)의 토지를 정(井) 자 모양으로 구획하여 한가운데를 공전으로 삼고 그 나머지 여덟 구역은 사전으로 삼았다.
공전서창촉[共剪西窓燭] 당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시에 “어찌하면 함께 서쪽 창의 촛불 심지 자르면서, 파산의 밤비 내리던 때를 얘기해 볼꼬.[何當共剪西窓燭 卻話巴山夜雨時]”라 하였다.
공전옥수화[空傳玉樹花] 진(陳)나라가 망할 때에 후주(後主)가 밤낮으로 술과 여색에 미혹하여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음란한 곡조를 불렀다. 당나라 시인 두목지(杜牧之)가 그의 고도(古都)를 지나다가 “장사치 계집들은 나라 망한 한(恨)도 모르고 강가에서 아직도 정화를 부른다.[尙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라는 시를 지었다.
공전절후[空前絶後] 전에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고 앞으로 절대로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일을 이른다. 매우 드문 일을 가리킨다. 전무후무(前無後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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