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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환[空還]~공환[孔奐]~공황소두[龔黃召杜]


공환[空還]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옴을 이른다.

공환[孔奐]  진(陳)나라 때 회계산음(會稽山陰) 사람으로 자는 휴문(休文)이다. 무제(武帝) 때에 진릉태수(晉陵太守)가 되어 많은 선정을 베풀었고, 선제(宣帝) 때에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후주(後主) 때 홍범궁위위(弘範宮衛尉)를 지냈다. <陳書 卷21 孔奐列傳> <南史 卷27>

공황[龔黃]  공황은 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의 순리(循吏)인 발해태수(渤海太守) 공수(龔遂)와 영천태수(潁川太守) 황패(黃霸)의 병칭이다. 이들은 모두 한(漢) 나라 때 순리(順吏)로서 치민리(治民吏)의 대표적 인물이다. 유자휘(劉子翬)의 시에 “백성 잘 다스리기론 한 나라 공황이 최고일레[治民漢許龔黃最]”라고 하였다. 지방장관의 미칭(美稱)으로 흔히 쓰인다.

공황[龔黃]  공황은 한(漢)나라 때 지방관으로서 치민(治民)을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발해태수(渤海太守) 공수(龔遂)와 영천태수(潁川太守) 황패(黃霸)를 합칭한 말인데,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오중전부탄(吳中田婦歎) 시에 “공황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은 다시 괴로우니, 도리어 하백의 부인이 되는 것만 못하리.[龔黃滿朝民更苦 不如却作河伯婦]”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공황[龔黃]  한(漢)나라의 모범 관리인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아울러 일컬은 것이다. 송서(宋書) 권92 양리열전(良吏列傳)에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한나라 때 호구가 번성하고 형벌을 쓸 일이 적었으며 군현에서 백성을 다스릴 때는 시끄럽게 하는 일이 없었다.……공황의 교화가 쉽게 이룩되었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공황[龔黃]  한대(漢代)의 치민리(治民吏)로 유명한 공수(龔遂)와 황패(黃覇)이다. 공수는 남평양(南平陽) 사람으로 자는 소경(少卿)이며, 벼슬은 선제(宣帝) 때 수형도위(水衡都尉)로서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황패는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차공(次公), 시호는 정(定)이다. 특히 율령(律令)에 밝았으며, 시랑알자(侍郞謁者)·하남 태수승(河南太守丞)·정위정(廷尉正)·영천태수(潁川太守) 등을 거쳐 승상(丞相)에 이르고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 이들은 모두 한대(漢代) 치민리(治民吏)의 으뜸으로 일컬어진다. <史記 卷96><漢書 卷89>

공황소두[龔黃召杜]  공황(龔黃)은 한(漢)나라 때 순리(循吏)로 백성을 잘 다스려 이름이 높았던 발해태수(渤海太守) 공수(龔遂)와 영천태수(潁川太守) 황패(黃霸)를 합칭한 말인데,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대표하게 되었다. 소두(召杜)는 한나라 때 남양태수(南陽太守)가 되어 선정을 많이 베푼 소신신(召信臣)과 후한의 두시(杜詩)를 합칭한 말인데, 두 사람이 선정을 베풀자 남양 사람들이 사모하여 “전에는 소신신 아버지가 계시더니, 나중에는 두시 어머니가 있네.[前有召父 後有杜母]”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61 杜詩列傳>

공황황[孔遑遑]  맹자(孟子) 등문공 하(縢文公 下)에 공자(孔子)가 벼슬을 잃은 지 석 달만 되면 마음이 황황하여 국경을 나갈 때에 반드시 폐백을 준비했다고 하였다. 황황(遑遑)은 바쁘다는 말인데 “공자 맹자도 역시 황황하였다.”는 구절이 송 나라 구양수(歐陽修)의 글에 있다. 공자와 맹자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 사방(四方)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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