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후[箜篌] 옛 현악기의 한 가지인데, 7현(絃)의 와공후(臥箜篌)가 있고, 23현의 수공후(豎箜篌) 등이 있다고 한다.
공후[箜篌] 현악기(絃樂器)의 일종으로 백제금(百濟琴)이라고도 한다. 종류는 수공후(豎箜篌), 와공후(臥箜篌), 봉수공후(鳳首箜篌)가 있다. 통전(通典)에는 “그 모양은 비파와 같으며 굽었고 길고 현(絃)으로 되어 있으며, 가슴에 대고 두 손으로 탄다.”고 하였다.
공후간성[公侯干城] 국가를 위하여 방패가 되고 성이 되는 훌륭한 장수를 뜻한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토저(免罝)에 “씩씩하고 늠름한 장수는 공후의 방패와 성이로다.[赳赳武夫, 公侯干城.]”라고 하였다.
공후복심[公侯腹心] 시경(詩經) 토저(兔罝)에 “용맹한 무부는 공후의 복심 역할을 하도다.[赳赳武夫 公侯腹心]”라고 하였다.
공후사[箜篌詞] 고조선(古朝鮮)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처(妻) 여옥(麗玉)이 지었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공후인(箜篌引))’를 말한다. 한 노인이 미쳐서 머리를 흩뜨린 채 술병을 들고 강물을 건너다가 빠져 죽자, 이를 말리던 노인의 처 역시 공후(箜篌)를 끌어다 노래를 부르고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樂府詩集 相和歌辭 箜篌引>
공후인[箜篌引] 고대(古代) 중국의 악부(樂府) 상화가(相和歌)의 하나이다. 고조선(古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악부곡으로, 어떤 백수광부(白首狂夫)가 하수(河水)를 건너다 빠져 죽자, 그의 아내가 공후(箜篌)를 가져다 슬피 노래한 다음 그 역시 하수에 투신자살한 사실을 남편으로부터 전해 듣고 이 곡을 지었다 한다. 공무도하가(公无渡河歌)라고도 한다.
공후인[箜篌引] 악부 상화가사(相和歌辭) 중의 하나로, 공무도하(公無渡河)라고도 한다. 노래의 저작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조선(古朝鮮)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가 지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조선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가 강가에서 배를 닦고 있을 때 머리를 풀어 헤치고 호리병을 찬 백수광부가 강을 건너려 했다. 백수광부의 아내가 뒤쫓아 갔으나 광부가 빠져 죽어 버리니, 한탄하던 그 아내는 공후(箜篌)를 타며 노래를 부른 뒤 자신도 빠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자신의 아내 여옥(麗玉)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여옥이 공후를 타며 그 노래를 불러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古今注 卷中> 이 노래는 한나라 때 악부로 채집되었고, 남조(南朝) 이후로 많은 시인들이 의작(擬作)한 바 있다.
공후입몽[箜篌入夢] 미래에 자기 아내가 될 여인을 꿈에 본 것을 일러 공후입몽(箜篌入夢)이라고 한다. <閱微草堂筆記>
공후주자[箜篌朱字] 이생(李生)과 노생(盧生)은 예전에 태백산에서 함께 독서하고 도술을 연마한 사이였는데, 뒤에 두 사람이 양주(揚州)에서 다시 만나게 되자 노생이 이생을 북정(北亭)으로 데려가서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 아름다운 여인이 공후(箜篌)를 연주하며 흥을 돋웠는데, 이생은 공후에 붉은 글자로 “하늘 끝에서 옛 배를 알아보고, 구름 사이에서 강 나무를 알아본다.[天際識舊舟 雲間辯江樹]”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노생이 이생더러 그 여인과 혼인할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으나, 이생은 “내가 어떻게 혼인을 하겠는가.”라며 사양하고 헤어졌다. 이생은 다시 또 변주(汴州)로 가서 육장원(陸長源)의 딸과 혼인을 하였는데, 신부의 모습이 전에 북정에서 본 여인과 흡사하였고, 공후를 보니 그때 보았던 두 구(句)의 붉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생이 신부에게 양주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말하니, 신부가 “이것은 제가 어렸을 때 형제들이 써 놓은 것입니다. 어젯밤 꿈에 사자(使者)가 와서 ‘신선을 따르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해 주었는데, 모두 당신의 말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하였으므로, 이생이 매우 기뻐하였다. <太平廣記 卷17>
공후지광[公侯地廣] 공(公)은 봉지(封地)가 사방 5백리이고, 후(侯)는 사방 4백리, 백(伯)은 사방 3백리, 자(子)는 사방 2백리, 남(男)은 사방 1백리이다. <周禮 大司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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