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번[郭墦] 곽번(郭墦)은 동쪽 성곽의 무덤이란 뜻인데, 부정한 방법으로 벼슬을 취하고 남에게 자랑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본래는 동쪽 성곽의 무덤이란 뜻으로, 옛날 제(齊)나라의 한 천부(賤夫)가 날마다 동곽(東郭)의 묘지 사이를 돌아다니며 제사 음식을 주워 먹고도 으스대며 자랑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동곽번간(東郭墦間). 지조 없이 벼슬을 구걸하는 행위.
곽병주[郭幷州] 후한 때 어진 수령으로 이름이 난 곽급(郭伋)을 가리킨다. 곽급이 병주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은혜로운 정사를 폈는데, 순시를 하다가 서하(西河)의 미직(美稷)에 도착하자, 어린아이 수백 명이 각자 죽마를 타고 길가에서 절을 하면서 맞이하였다. <後漢書 卷31 郭伋列傳>
곽분양[郭汾陽] 곽 분양은 당(唐) 나라 때의 명장(名將)으로, 벼슬이 태위 중서령(太尉中書令)에 이르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진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부귀영화를 최고로 누린 다복한 사람으로서 8인의 아들과 7인의 사위가 모두 귀현(貴顯)하게 되었고, 손자는 수십 인이나 되어 얼굴도 다 알지 못했으므로, 문안을 올리면 그저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고 한다. <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곽분양[郭汾陽] 곽분양은 곽자의(郭子儀)를 말한다. 곽자의는 안사(安史)의 난(亂)을 평정한 일등공신으로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으며, 부귀와 장수를 누리고 후손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였다. 총신(寵臣) 어조은(魚朝恩)이 관군용선위처치사(觀軍容宣尉處置使)로서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인 곽자의를 견제하고 집요하게 모함했으나, 곽자의는 은인자중하며 잘 대처하여 어조은의 참소가 끝내 통하지 못했다.
곽분양[郭汾陽] 곽분양의 이름은 자의(子儀)이다. 당 현종(唐玄宗) 때 삭방 절도사(朔方節度使)가 되어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하여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지고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다. 장수와 부귀를 누리고 자손이 번창하여 가장 팔자가 좋은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玉芝堂談薈 卷5 三世將相> <封氏聞見記 卷5 第宅>
곽분양[郭汾陽] 당 숙종(唐肅宗) 때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진 곽자의(郭子儀)를 말한다. 무려 20년 동안 천하의 안위(安危)를 한 몸에 짊어진 명장이요 명상으로서, 덕종(德宗)으로부터 상보(尙父)의 칭호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곽분양[郭汾陽] 당나라 때의 명장(名將)인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킨다. 곽자의가 부귀영화를 극도로 누렸으면서도 생시와 사후에 아무 일 없이 영총(榮寵)을 끝까지 입었다 하여 그의 열전에 “부귀와 장수를 누렸고 살아서는 존경을, 죽어서는 애도함을 끝까지 입어서 신하의 도리에 조금도 결점이 없었다.” 하였으며, 게다가 자손들이 많아 인사를 올리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고 그저 턱을 끄덕거렸다 한다. <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곽분양[郭汾陽] 당나라 화주(華州) 사람 곽자의(郭子儀)인데, 무과출신(武科出身)으로 벼슬이 삭방 절도사(朔方節度使)에까지 이르렀다.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하여 큰 공을 세우자, 숙종(肅宗)이 그를 위로하기를 “나라가 중흥한 것은 경의 힘이었다.” 하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하였다. 봉건 시대에는 대부분 천자의 친척이 왕이 되었는데 곽 분양은 이성(異姓)으로 왕이 되었다. <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곽분양[郭汾陽] 당나라의 무장(武將)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킨다. 756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삭방 절도사(朔方節度使)로서 난리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환관 어조은(魚朝恩) 등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 후 위구르를 회유하고 토번(吐蕃)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큰 공을 세워 덕종(德宗)으로부터 상보(尙父)의 호칭을 받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舊唐書 卷120 郭子儀列傳>
곽분양[郭汾陽] 분양은 곽자의(郭子儀)의 봉호(封號). 당 현종(唐玄宗) 때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하였고, 회흘(回紇)과 손잡고 토번(吐蕃)을 정벌하였다.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하여졌다. 곽 영공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20년 동안 천하의 안위(安危)가 그의 한 몸에 달려 있었는데, 그가 오래도록 중서령(中書令)으로 재직하면서 무려 스물네 번이나 인사 고과를 매기는 등 천하에 위세를 부렸는데도 조정이 시기하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충성과 공(功)을 끝까지 보존하여 오래 살고 복 많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수명은 85세였다. <舊唐書 郭子儀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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