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세[郭貰] 곽자의(郭子儀)가 풀어 주었다는 뜻으로, 당(唐)나라 때 곽자의가 일찍이 죄진 일이 있었는데, 이백(李白)이 곽자의의 모습을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구원해 주었다. 그 뒤 안녹산(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났을 때, 이백이 영왕(永王) 인(璘)의 막하에서 종사(從事)하다가 영왕이 패함에 미쳐서 연좌되어 죄를 받게 되었는데, 곽자의가 관직을 해임하는 것으로써 죄를 속(贖)하도록 청하여 구원해 주었다. <新唐書 卷202 李白列傳>
곽세후[郭細侯] 세후는 동한(東漢) 때의 곽급(郭伋)의 자이다. 곽급은 지방관을 두루 지내면서 정치를 잘하여 그가 가는 고을마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환영하였다. 병주(幷州)에 재차 부임하였을 때에는, 서하(西河)에 이르자 어린이 수백 명이 죽마(竹馬)를 타고 길에 나와 환영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31 곽급열전(郭伋列傳)에 나오며, 태평어람(太平御覽),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패문운부(佩文韻府) 등에 전한다.
곽세후[郭細侯] 세후는 후한(後漢) 곽급(郭伋)의 자(字)이다. 곽급이 왕망(王莽) 때에 병주목(幷州牧)으로 있었는데 광무(光武) 때에 재차 병주목으로 부임하자 옛날 은혜를 입었던 고을의 노약자들이 서로들 도로에 나와 영접하였고 또 경내를 순행할 때 아동 수백 명이 죽마(竹馬)에 올라타고서 환영하며 절을 했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郭伋傳>
곽수경[郭守敬] 원나라 순덕(順德) 형태인(邢台人)이다. 자는 약사(若思)이다. 조부에게 수학과 수리(水利)를 배우고 원세조(元世祖)에게 수운의 개통을 건의하여 제로하거제거(諸路河渠提擧)를 맡았다. 왕순(王恂) 등과 함께 수시력(授時曆)을 편찬하고 여러 천문기기를 제조하였다. 또 전국에 관측소를 개설하여 실제 관측을 통해 양충보(楊忠輔)의 ‘1년이 365.2425일’이라는 설을 증명하였다.
곽수불방이원수장[郭修不防而元帥戕] 곽수(郭修)를 방비하지 않아 원수(元帥)가 살해당함. 곽수(郭修)는 자(字)가 효선(孝先)으로 삼국시대 위(魏)나라 서평(西平) 사람이며, 원수(元帥)는 촉한(蜀漢)의 정승이자 대장군인 비의(費禕)를 가리킨다. 곽수(郭修)는 위(魏)나라의 중랑장(中郞將)이었는데 촉한(蜀漢)의 장수 강유(姜維)에게 패하여 투항하고 좌장군(左將軍)에 임명되었으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던 중 후주(後主) 연희(延熙) 6년(253) 정월에 비의(費禕)가 장병들과 회식하고 크게 취하자, 그를 칼로 찔러 죽였다. 그 후 촉한(蜀漢)이 위(魏)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위(魏)나라 황제 조방(曹芳)은 곽수(郭修)를 장락향후(長樂鄉侯)로 추봉하고 시호를 위후(威侯)라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후주전(後主傳)과 비의전(費禕傳)에는 ‘곽순(郭循)’으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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