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원진[郭元振] 원진은 당나라 때의 명장이자 재상, 시인인 곽진(郭震)의 자이다. 곽진이 태학생일 때 집에서 거액의 학자금을 보내왔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 “5세(世)째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돈을 좀 빌려 주십시오.” 하자, 전혀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이 선뜻 빌려 주면서 그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22 郭元振列傳>
곽원진[郭元振] 원진은 당나라 때의 명장이자 재상, 시인인 곽진(郭震)의 자(字)이다.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었다. 16살 때 태학생이 되었고,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통천위(通泉尉)가 되었다. 무후(武后)가 그가 지은 보검편(寶劍篇)을 읽어 보고는 크게 칭찬을 하였다. 양주도독(凉州都督), 삭방군 대총관(朔方軍大總管), 병부상서(兵部尙書) 등을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으며, 대국공(代國公)에 봉해졌다. 명황(明皇)이 여산(驪山)에서 강무(講武)할 때 군용(軍容)이 정비되지 않았다고 하여 신주(新州)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요주사마(饒州司馬)로 부임하는 중에 병으로 죽었다. 전당시(全唐詩)와 전당문(全唐文)에 약간의 저작이 전한다. <新唐書 卷122 郭元振列傳>
곽유도[郭有道] 곽유도는 후한 때의 은사(隱士)인 곽태(郭太)를 가리킨다. 곽태의 자는 임종(林宗)이고 유도(有道)는 곽태가 도(道)를 지닌 사람으로 천거되었기 때문에 불린 이름이다. 어떤 사람이 범방(范滂)에게 곽태가 어떤 인물이냐고 묻자 “은거하면서도 가까운 사람을 떠나지 않았고 도도하면서도 속세를 끊지 않았으며, 천자도 그를 신하로 삼지 못했고 제후도 그를 벗으로 삼지 못했으니 나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하였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곽유도[郭有道] 곽유도는 후한(後漢) 말의 학자인 곽태(郭泰)로, ‘유도’는 당시 사람들이 ‘유도선생(有道先生)’이라고 부른 데서 온 호이다. 곽태가 원굉(袁閎)을 방문할 때에는 수레를 멈추지도 않고 말방울 소리가 그치지도 않을 만큼 잠깐만 들렀는데, 황헌(黃憲)을 방문해서는 하루를 다 보내고 다음 날까지 머무르자,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곽태는 “황헌의 넓고 넓음은 마치 1만 이랑이나 되는 못과 같아서, 이를 맑게 하려 해도 깨끗해지지 않고 흔들어도 흐려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한다. <世說新語 德行>
곽유도[郭有道] 후한 때의 은사(隱士)인 곽태(郭太)이다. 자는 임종(林宗)이고, 유도는 곽태가 유도지사(有道之士)라는 과목으로 천거되었기 때문에 불린 이름이다. 후한의 대유인 이응(李膺)과 친분이 깊었다.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중망을 얻었으나 위태한 말이나 각박한 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고의 화란을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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