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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觀書]~관서공자[關西孔子]~관서백기[關西伯起]


관서[觀書]  장재(張載)가 독서하는 방법에 대하여 “책을 보는 까닭은 자신의 의심을 풀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밝히려 해서이다. 책을 볼 때마다 새로 유익한 것을 알게 되면 학문이 진보할 것이고, 의심하지 않던 곳을 의심하여야 비로소 전전이 있을 것이다.[所以觀書者 釋己之疑 明己之未達 每見 每知新益 則學進矣 於不疑處 有疑 方是進矣]”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3 致知>

관서[關西]  황해도와 평안도를 이른다.

관서[觀書]  회암(晦庵) 주희(朱熹)의 ‘관서유감 이수(觀書有感二首)’를 이른다. 첫째 시는 “반묘의 네모난 연못 한 거울처럼 열렸는데,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 묻노니 어찌하여 그처럼 맑은가? 근원에 활수가 솟아나기 때문이라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이고, 둘째 시는 “지난 밤 강가에 봄물이 불어나니, 거대한 배가 터럭처럼 떠올랐네. 이전에 힘들여 옮기려고 애썼는데, 오늘은 강 가운데 저절로 떠다니네.[昨夜江邊春水生, 蒙衝巨艦一毛輕. 向來枉費推移力, 此日中流自在行.]”이다.

관서공자[關西孔子]  관서(關西)는 후한(後漢)의 양진(楊震)이 살았던 곳이다. 양진의 자는 백기(伯起)인데, 경학(經學)에 밝고 박람(博覽)하여 궁구하지 않음이 없어 당시의 여러 선비들이 그를 두고 관서공자(關西孔子) 양백기(楊伯起)라고 말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관서공자양백기[關西孔子楊伯起]  백기(伯起)는 양진(楊震)의 자(字)인 바, 젊었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經書)에 통달하였으므로 당시 선비들이 ‘관서공자(關西孔子)’라고 칭하였다.

관서백기[關西伯起]  백기는 후한 때 홍농(弘農) 사람 양진(楊震)의 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경전에 특히 밝았으므로 당시의 선비들로부터 ‘관서 지방의 스승은 양백기(楊伯起)’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는 홍농이 중국의 관서 지방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양진은 50세에 무재(茂才)로 추천되어, 형주자사(荊州刺史) 등을 역임하고 안제(安帝) 영녕(永寧) 원년(120)에 사도(司徒)가 되었으며, 연광(延光) 2년(123)에 태위(太尉)가 되었다. 성품이 청백하였으며, 외척과 환관의 발호를 막기 위해 애를 쓰다가 오히려 참소를 받고 면직되자 분개하여 음독자살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관서봉[關西鳳]  후한(後漢) 때의 현인인 양진(楊震)을 가리키며, ‘관서공자(關西孔子)’라고도 하였다. 그는 50세에 무재(茂才)로 추천되어, 형주자사(荊州刺史)를 네 번 지내고 동래태수(東萊太守)・탁군태수(涿郡太守)를 거쳐 태위(太尉)가 되었는데, 특히 박학(博學)과 청렴(淸廉)으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일찍이 자기가 천거했던 창읍 영(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금(金) 10근을 싸 가지고 와서 바치자, 말하기를 “나는 그대를 알아주었는데, 그대가 나를 몰라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왕밀이 말하기를 “저문 밤이라, 아무도 알 사람이 없습니다.[暮夜無知者]”하자, 양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하여 알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관서부자[關西夫子]  후한(後漢) 때 홍농(弘農) 사람인 양진(楊震)이다. 양진은 성품이 몹시 청렴결백하였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경전(經典)에 특히 밝았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관서공자양백기(關西孔子楊伯起)’라고 칭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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