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영[管寧]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자는 유안(幼安), 관자(管子)라고도 칭해진다. 학문에 독실하였다. 그가 소시에 화흠(華歆)과 한 자리에서 글을 읽게 되었는데 높은 벼슬아치의 행차가 그 문 앞을 지나가자 화흠은 글 읽는 일을 폐지하고 나가서 구경하였다. 그러자 관영은 즉시 자리를 잘라 나누어 앉으며 “자네는 나의 벗이 아니다.” 하였다. 동한 말에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요동으로 피해 가 사니, 그를 따른 자들이 매우 많았다. 시서(詩書)를 강론하고 예양(禮讓)을 밝히니 백성들이 순후해져 쟁송(爭訟)이 없어졌다. 문제(文帝)와 명제(明帝)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三國志 卷11> 관녕(管寧).
관영[管寧] 관영은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품격이 높았던 선비이다. 관영은 항상 같은 목탑(木榻)에 앉아 지냈는데, 55년 간을 항상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무릎이 닿는 곳은 모두 뚫어졌다[常坐一木榻上 積五十五年未嘗箕踞 榻上當膝皆穿]고 한다. 이 고사는 단정한 자세로 일을 보는 것을 말할 때의 예화(例話)로 쓰인다. 관영은 화흠(華歆)과 함께 동석(同席)해서 독서(讀書)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떤 고관(高官)이 문 앞을 지나가자 관영은 동요없이 독서(讀書)에 빠져 있었지만 화흠(華歆)은 책을 덮고 나가 구경하였다. 그러자 관영은 동석(同席)했던 자리를 잘라 따로 앉으면서 “자네는 나의 친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는 관녕할석(管寧割席)이라는 고사로 유명하다. <世說新語 德行> 관녕(管寧).
관영[管寧] 관영은 삼국 시대 위(魏) 나라 북해(北海) 주허(朱虛) 사람으로 자는 유안(幼安)이다. 어려서 화흠(華歆)과 자리를 함께 하여 글을 읽다가 화흠이 문밖에 지나가는 벼슬아치를 보러 가자 관영은 즉시 그와 자리를 나누어 앉아 그를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한말(漢末) 황건적(黃巾賊)의 난 때 요동(遼東)으로 피난하여 항상 검은 모자에 굵은 베옷을 입고 은거(隱居)하였다. 따르는 자가 매우 많았으며 관영의 덕화에 백성들이 감화되어 다투거나 송사하는 일이 없었다. 난이 평정되자 37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다 사양하였다. <三國志魏志 十一 高士傳下> 관녕(管寧).
관영[灌嬰]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76년에 죽었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 였던 수양(睢陽) 출신으로 처음에는 비단장수였다가 한고조를 따라 종군하여 항우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워 영음후(穎陰侯)에 봉해졌다. 고조가 죽고 여씨들이 발호하자 진평, 주발 등과 함께 평정하고 한왕조를 안정시킴으로써 태위(太尉)가 되었고, 후에 승상(丞相)의 자리에 올랐다.
관영[貫盈] 가득 참.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
관영조두[管寧俎豆] 관영(管寧)은 16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그가 가난한 고아임을 불쌍히 여긴 친척들이 장례비용을 보냈으나 받지 않고 있는 재산에 맞추어 장례를 치렀다.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피해 요동으로 들어간 후에 초가집을 만들어 기거하였는데, 피난 온 이들이 모두 그가 있는 곳으로 따라와서 마을을 이루었다. 관영은 그곳에서 시경(詩經)과 상서(尙書)를 강의하고 제기의 진열 방법과 예식을 올릴 때 지녀야 할 태도 등을 가르쳤다. <三國志 魏書 卷11 管寧傳> 조두(俎豆)는 제기(祭器)의 이름으로 곧 제례(祭禮)를 가리킨다. 이는 시례(詩禮)와 함께 유가(儒家)의 선비들이 익혀야 할 기본예절을 말하는 것이다. 관녕조두(管寧俎豆).
관영탑[管寧榻] 진(晉) 나라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 관영조(管寧 條)에 의하면, 관영이 55년 동안 나무로 만든 탑상(榻牀)에 앉아 있었는데, 단정한 자세를 한 번도 잃은 적이 없었으므로, 무릎 닿는 곳에 모두 구멍이 뚫렸다[榻上當膝皆穿]고 한다. 관녕탑(管寧榻).
관예찬영[貫蕊餐英] 화심(花心)을 꿰고 꽃으로 밥을 지음. 이소경(離騷經)에 “균계를 들고 난초로 잇댐이여 벽예의 떨어진 화심을 꿰도다.[矯菌桂而紉蘭兮 貫薜荔之落蕊]”라고 하였고, 또 “아침에는 목란의 떨어지는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추국의 낙영으로 밥을 짓도다.[朝飮木蘭之墜露兮 夕餐秋菊之落英]”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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