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유[關楡] 관산의 느릅나무로, 북방 변경에 자라는 초목을 대표한다. 유관(楡關)이라고 하여 산해관(山海關)의 별칭으로도 쓰인다.
관유세공[官有世功] 한 가지 관직을 맡아서 대대로 공로가 있다는 뜻이다. 즉 같은 관직을 계속 전승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을 자식이 배운다고 한 것이다. 그럴 경우 그 관명(官名)으로 족(族)을 삼기도 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시(諡)와 족(族)을 어떻게 명명(命名)하였는가에 대한 설명을 보면 “천자는 덕이 있는 자를 제후로 세우고서 그가 출생한 지명을 그의 성(姓)으로 정해 주고, 땅을 봉(封)해 주고서 그 땅의 이름으로 씨(氏)를 명하며, 제후는 그 자(字)로서 시(諡)를 정해 주고, 그 자손은 이 시(諡)를 족(族)으로 삼으며, 관직을 맡아 대대로 공로가 있으면 그 후손들은 그 관명(官名)으로서 족을 삼기도 하며, 선조(先祖)의 봉읍(封邑)을 족으로 삼기도 한다.[天子建德 因生以賜姓 胙之土而命之氏 請侯以字爲諡 因以爲族 官有世功 則有官族 邑亦如之]”고 하였다.
관유안[管幼安] 유안은 관녕(管寧)의 자이다. 후한 영제(靈帝) 말년에 피난하여 요동에 이른 뒤 초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여러 차례나 조정의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았으며, 항상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목탑(木榻)에 앉아 고결한 모습을 보였으므로 세상에서 현자로 칭송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士傳 下>
관유안[管幼安]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 주허(朱虛) 사람인 관녕(管寧)을 말한다. 유안(幼安)은 그의 자이다. 그는 황건적(黃巾賊)의 난에 요동(遼東)으로 피하여 가서 공손도(公孫度)에게 의지했는데, 그곳에서 따르는 사람이 많아 한 고을을 이룰 정도였고 이들에게 시서(詩書)를 강론하여 교화(敎化)를 이루었다. 그 뒤 바다를 건너 돌아와 절개를 지키며 산속에 묻혀 살았는데, 늘 나무 걸상에 단정히 앉아 있어 무릎이 닿은 곳의 나무 부분이 닳아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관유안[管幼安] 유안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인 관녕(管寧)의 자이다. 어렸을 때 화흠(華歆)과 나란히 앉아 글을 읽다가 화흠이 문밖에 지나가는 벼슬아치를 보러 가자 관녕은 즉시 그와 자리를 나누어 앉아 친구로 여기지 않았을 정도로 개결하였다. 또 관영이 화흠과 함께 김을 매다가 금덩이가 앞에 보이자 관영은 호미로 밀어 버리며 돌아보지 아니하고, 화흠은 주워 보고서 던졌다 한다. 한(漢)나라 말기 황건적의 난 때 요동으로 피란을 갔는데, 따르는 자가 매우 많았으며, 백성이 그의 덕화에 감화되어 다투거나 송사하는 일이 없었다. 항상 검은 모자[皁帽]를 쓰고, 80세가 넘도록 항상 나무 걸상에 꿇어앉아 글을 읽다 보니 무릎이 닿은 곳이 닳아서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世說新語 德行>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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