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려[獷戾] 흉포(凶暴)하여 인도(人道)에 어그러짐을 이른다.
광려[匡廬] 광려는 강서(江西)의 여산(廬山)으로, 은(殷)과 주(周)의 교체기에 광속(匡俗)의 형제 7인이 이곳에 초막을 짓고 선도(仙道)를 닦았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郡國志4 盧江郡 引 廬山記略>
광려게[匡廬偈] 광려산은 중국의 여산(廬山)을 이른다. 소식(蘇軾)의 제서림벽시(題西林壁詩)에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알 수 없음은,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네.[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고 한 것을 말하는데, 산의 참모습을 쉽게 알 수 없음을 뜻한다.
광려마저[匡廬磨杵] 다시 뜻을 가다듬고 공부에 매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백(李白)이 소싯적에 독서하다가 그만두고 여산(廬山)을 내려올 적에 길에서 노파가 공이를 갈고 있으므로 그 이유를 물어보니 바늘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였는데, 이백이 이 대답을 듣고는 반성하며 다시 돌아가 열심히 공부했다는 마저성침(磨杵成針)의 고사가 전한다. 광려(匡廬)는 은(殷)・주(周)의 교체기에 광유(匡裕) 형제 7인이 초막을 짓고 살았던 여산이라는 뜻으로, 여산의 별칭으로 쓰인다.
광려산[匡廬山] 강서성(江西省) 성자현(星子縣)에 있는 산 이름이다. 남당(南唐) 때부터 이곳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있었는데, 중간에 쇠퇴하였던 것을 주자가 다시 일으켰다.
광려산[匡廬山]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이다. 전설에 은(殷)나라 주(周)나라 무렵에 광속(匡俗) 형제 7인이 이곳에 여막을 짓고 은거하여 광려산(匡廬山)이라고 했다고 한다. 소식(蘇軾)의 제서림벽(題西林壁)에 “가로로 보면 고개이고 옆으로 보면 봉우리인데, 멀고 가깝고 높고 낮고 각각이 다 다르네.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알 수 없음은,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네.[橫看成嶺側成峯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고 했다.
광려산[匡廬山] 광려산은 강서성(江西省)의 여산(廬山)이다. 백거이가 태자좌찬성(太子左贊成)으로 있다가 재상의 미움을 받아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어 있던 중 46세 때인 원화(元和) 12년 3월에 여산의 향로봉(香爐峯)과 유애사(遺愛寺) 중간에 세 칸의 초당(草堂)을 지어 놓고 이듬해 11월까지 거기서 생활하였다. <白氏長慶集 卷四十三 草堂記・白香山詩集 年譜>
광려시게[匡廬詩偈] 광려산(匡廬山)은 중국의 여산(廬山)을 이른다. 소식(蘇軾)의 제서림벽시(題西林壁詩)에 “여산이라 참 면목을 알다가도 모를레라. 다만 몸이 이 산속에 매여있는 때문일레[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고 한 것을 말한다. 산의 참모습을 쉽게 알 수 없음을 뜻한다.
광려식면진[匡廬識面眞] 광려(匡廬)는 곧 여산(廬山)의 별칭이다. 소식(蘇軾)의 제서림벽(題西林壁) 시에 의하면 “가로로 보면 산마루요 곁에서 보면 봉우리라, 원근에 따라 높고 낮음이 각각 다르구려.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이 몸이 이 산 가운데 있기 때문일세.[橫看成嶺側成峯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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