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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도[廣陵濤]~광릉산[廣陵散]~광릉성[廣陵城]


광릉도[廣陵濤]  광릉도는 한(漢) 나라 매숙(枚叔)이 칠발(七發)로써 초 태자(楚太子)의 병을 치유하는데 제5발에 “객이 말하기를 ‘장차 팔월 보름에, 여러 제후들과 먼 곳에서 어울려 지내는 형제들과 함께, 파도 보러 광릉(廣陵)의 굽이진 강으로 가십시오. 가보시면 보지 못했던 파도형태를 보실 것입니다.’[客曰: 將以八月之望, 與諸侯遠方交遊兄弟, 並往觀濤于廣陵之典江.]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광릉산[廣陵散]  거문고 곡조의 이름이다. 삼국시대 위(魏) 나라 혜강(嵇康)이 즐겨 연주하던 금곡(琴曲) 이름으로, 참소를 받고 사형을 당할 때, 형장(刑場)에서 마지막으로 그 곡을 탄주하고 곡이 끝난 뒤에 탄식하기를 “원효니(袁孝尼)가 일찍이 나에게 광릉산을 배우겠다 하였으나 나는 그때마다 거절하였는데, 광릉산이 이제 맥이 끊기는구나.[廣陵散 於今絶矣]”라고 하였다. <三國志 卷二十一 王粲傳 註>

광릉산[廣陵散]  광릉산은 거문고의 곡조 이름으로, 진(晉)나라의 혜강(嵇康)이 낙서(洛西)에서 놀 때 화양정(華陽亭)에서 자면서 거문고를 퉁기다가 뜻밖에 나타난 어느 객으로부터 전수받은 곡이다. 뒤에 혜강이 종회(鍾會)의 참소로 인하여 사마소(司馬昭)에게 죽으면서 형장에서 그 곡을 마지막으로 타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 곡조를 나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해 주지 않았더니, 이제는 영영 세상에서 없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晉書 卷49 嵇康列傳>

광릉산[廣陵散]  금곡명(琴曲名). 삼국 시대(三國時代) 위(魏)의 혜강(嵇康)이 낙서(洛西)에 노닐다가 화양정(華陽亭)에 묵으면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갑자기 어떤 나그네가 앞으로 나와 거문고를 달라고 하더니 광릉산을 연주하여 들려주었는데, 성조가 매우 뛰어났다. 결코 남에게 그것을 전해 주지 않을 것을 맹세했는데, 혜강이 사마흔(司馬昕)에게 해를 당하기 직전에 한 번 타고 죽으니, 결국 곡조가 끊겼다고 한다. <晉書 嵇康傳>

광릉산[廣陵散]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혜강(嵇康)이 탔던 금곡(琴曲) 이름이다. 혜강이 평소에 이 곡을 잘 탔으나, 이를 숨겨 두고 남에게 전수(傳授)하지 않았다가, 뒤에 그가 참소(讒訴)를 입어 해(害)를 당할 때 형장(刑場)에 임하여 그 곡을 한번 타고 나서 말하기를 “광릉산이 지금부터 끊어지게 되었다.[廣陵散 於今絶矣]”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다시 들을 수 없는 절향(絶響)의 뜻으로 쓰인다.

광릉산[廣陵散]  혜강(嵇康)이 형(刑)을 받고 죽을 때에 탔던 거문고 곡조이다. 그는 이 곡을 타면서 “이것이 (廣陵散)이란 곡조인데 전일에 원효니(袁孝尼)가 나더러 가르쳐 달라는 것을 아껴 불응하였더니, 이제 이 곡조가 세상에서 아주 사라지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晉書 卷49 嵇康列傳>

광릉산[廣陵散]  혜강이 즐겨 연주하던 금곡(琴曲) 이름이다. 진(晉)의 혜강(嵆康)이 사마소(司馬昭)에게 끌려 동시(東市)의 형장으로 갔을 때 태학생(太學生) 3천 명이 나서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청했으나 사마소가 불허하자, 혜강은 그 전에 화양정(華陽亭)에서 자면서 어느 나그네에게 전수받았던 광릉산(廣陵散)을 마지막으로 거문고 가락에 울려 연주했다고 한다. <晉書 卷49 嵆康列傳>

광릉성[廣陵城]  양주(揚州)를 가리킨다. 서한(西漢)의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성을 쌓았다. 그 뒤에 남조(南朝) 송(宋) 경릉왕(竟陵王) 유탄(劉誕)이 광릉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여 마침내 황무(荒蕪)해졌는데, 포조(鮑照)가 무성부(蕪城賦)를 지어 슬퍼하였으므로 무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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