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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군[廣武君]~광무제[光武帝]~광무지책[光武之幘]


광모류산백불수[狂謀謬算百不遂]  소식(蘇軾)의 송안돈수재실해서귀(送安惇秀才失解西歸) 시에 “어긋난 계책은 백에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 오직 흰 귀밑털만 기약한 듯이 찾아오네.[狂謀謬算百不遂 惟有霜鬢來如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6>

광묘[光廟]  고려 제4대 임금인 광종(光宗)을 가리키는데, 고려 시대에 그가 처음으로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했다.

광무[光武]  왕망(王莽)을 쳐부수고 한(漢)을 중흥시킨 동한(東漢: 後漢)의 창업주 광무황제(光武皇帝). 동한(東漢)의 초대 황제 유수(劉秀)로, 광무(光武)는 시호(諡號)이다. 자는 문숙(文叔),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이다. 남양(南陽) 채양(蔡陽) 사람으로,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젊었을 때 장안(長安)에서 공부하였으며,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말에 군웅이 봉기하자 거병하여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25년에 즉위하여 한(漢)을 재건하고 낙양(洛陽)에 도읍하였다. 이후 남은 군웅들을 평정하고 36년에 천하를 완전히 통일하였다. 즉위 후 조세와 요역을 경감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유교(儒敎)를 숭상하여 예교주의(禮敎主義)를 확립하였다.

광무[廣武]  광무산(廣武山)을 말한다. 초(楚)나라 항우(項羽)와 한(漢)나라 유방(劉邦)이 몇 달 동안 대치했던 곳이다. <史記 卷7 項羽本紀>

광무[曠務]  직무를 다하지 아니함을 이른다.

광무군[廣武君]  광무군(廣武君)은 조(趙)나라 장군으로서 진여(陳餘)에게 와서 광무군의 봉호를 받은 이좌거(李左車)를 말한다. 이좌거는 한신(韓信)이 조나라를 공격했을 때에 성을 굳게 지키는 한편 한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보급로를 차단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진여가 듣지 않자, 한신에게 귀순한 뒤에 연과 제를 공략할 방책을 제시하였는데 한신이 그 말을 따랐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광무산[廣武山]  산 이름으로 초(楚) 나라 항우(項羽)와 한(漢) 나라 유방(劉邦)이 각각 이곳에서 몇 달 동안 대치했었다.<史記 項羽本紀>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동북에 있다. 동서의 두 봉에 각각 성을 쌓아 한나라가 황하로 통하는 길을 차단했다. 봉우리 사이의 계곡에는 광무간이라는 하천이 북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 기원전 203년 초한 쟁패시 항우와 유방이 광무성의 동서 양쪽에 주둔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설전을 벌인 곳이다.

광무제[光武帝]  광무제는 한 고조(漢高祖)에 의해 세워진 서한(西漢)이 왕망(王莽)에 의해 망한 뒤에 다시 일어나 왕망을 무너뜨리고 동한(東漢)을 세운 임금으로, 본명은 유수(劉秀)이며, 남양(南陽)의 용릉(舂陵)에서 기병하였다.

광무지책[光武之幘]  후한(後漢) 때 마원(馬援)이 외효(隗囂)의 사자(使者)로서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를 보러 갔더니, 광무제는 아무런 예식(禮式)을 갖추지 않고 평복으로 건(巾)을 재껴 쓰고 친구처럼 마원을 맞았던 데서 온 말로, 곧 위의(威儀)를 갖추지 않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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