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문[廣文] 청빈함을 지키면서 한가로이 지낼 수 있는 유학교관(儒學敎官)을 가리킨다. 광문은 당(唐)나라 천보(天寶) 9년에 국자감(國子監)에다 광문관(廣文館)을 증설(增設)하여 박사(博士)・조교(助敎)를 두어 국자학생(國子學生) 중에 진사(進士) 시험 준비를 하는 자들을 지도하도록 하였다.
광문[廣文] 광문은 본디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인으로 시(詩)・서(書)・화(畫)에 모두 뛰어나서 일찍이 현종으로부터 ‘정건삼절(鄭虔三絶)’이란 어필(御筆)을 받기까지 했던 정건(鄭虔)을 가리킨다. 현종이 일찍이 그를 위해 광문관(廣文館)을 설치하고 그를 박사(博士)로 삼았으므로 후에 그를 광문이라 일컫게 되었다. <新唐書 卷202 鄭虔傳>
광문[廣文]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인 정건(鄭虔)으로, 현종이 일찍이 광문관(廣文館)을 설치하고 정건을 박사(博士)로 삼은 데서, 그를 광문이라 칭하게 되었다. 정건이 몹시 가난하였으므로, 두보(杜甫)가 일찍이 그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희간정광문(戱簡鄭廣文) 시에 “재주 명성은 삼십 년을 날렸으되, 빈객은 추워도 앉을 방석이 없네.[才名三十年 坐客寒無氈]”라고 하였다.
광문[廣文] 당나라 문인 정건(鄭虔)으로, 광문은 가난하고 한산한 교관(敎官) 등의 벼슬을 가리킨다. 당나라 천보(天寶) 9년(750)에 국자감(國子監)에다 광문관(廣文館)을 증설하여 박사(博士)・조교(助敎)를 두어 국자학생(國子學生) 중에 진사(進士) 시험 준비를 하는 자들을 지도하도록 하였다. 정건이 일찍이 광문박사(廣文博士)를 맡았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이 한직(閑職)으로 여겼다.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권3 취시가증광문관학사정건(醉時歌贈廣文館學士鄭虔)에 “제공들은 줄지어서 대성으로 가건만 광문 선생 혼자서 한직에 남았었네. 부잣집은 분분하게 성찬도 싫어하는데 광문 선생 혼자만 먹는 것도 부족하네.[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冷 甲第紛紛厭粱肉 廣文先生飯不足]”라고 하였다.
광문[廣文] 두보(杜甫)의 친구였던 광문 선생(廣文先生) 정건(鄭虔)으로, 시(詩)・서(書)・화(畫)의 3예(藝)에 능하여 정건삼절(鄭虔三絶)로 일컬어져 온다. 당 현종(唐玄宗)이 그의 재질을 아낀 나머지 그를 위해 광문관(廣文館)을 설치하고 박사(博士)로 임명하였는데, 두보의 ‘취시가(醉時歌)’ 중에 “광문 선생은 끼니도 제대로 못 먹어[廣文先生飯不足]”라는 구절이 나온다. <唐書 文藝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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