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문관[廣文官] 가난하고 한산한 교관(敎官) 등의 벼슬을 가리킨다. 당(唐)나라 천보(天寶) 9년(750)에 국자감(國子監)에다 광문관(廣文館)을 증설하여 박사(博士)・조교(助敎)를 두어 국자학생(國子學生) 중에 진사(進士) 시험 준비를 하는 자들을 지도하도록 하였다. 정건(鄭虔)이 일찍이 광문박사(廣文博士)를 맡았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이 한직(閑職)으로 여겼다.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권3 취시가증광문관학사정건(醉時歌贈廣文館學士鄭虔)에 “제공들은 줄지어서 대성으로 가건만 광문 선생 혼자서 한직에 남았었네. 부잣집은 분분하게 성찬도 싫어하는데 광문 선생 혼자만 먹는 것도 부족하네.[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冷 甲第紛紛厭粱肉 廣文先生飯不足]”라고 하였다.
광문관[廣文官] 광문 벼슬은 당(唐)나라 때 국자감(國子監)에 딸린 광문관(廣文館)의 박사(博士)와 조교(助敎) 등을 말한다.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권3 취시가증광문관학사정건(醉時歌贈廣文館學士鄭虔)에 “제공들은 끊임없이 요직으로 오르는데 광문 선생 벼슬만은 쓸쓸하기 그지없네.[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冷]”라고 하였다.
광문관[廣文館] 광문관은 당(唐)나라 때의 학교 이름이다. 당 현종(唐玄宗)이 일찍이 문인 정건(鄭虔)을 위해 광문관을 설치하고 정건을 박사(博士)로 삼았다. 정건은 시(詩)・서(書)・화(畫)에 모두 뛰어나서 현종이 일찍이 그에게 ‘정건삼절(鄭虔三絶)’이란 어필을 내리기까지 하였으나, 평생 가난하기로 유명했다.
광문관[廣文官] 당(唐)나라 때 7학(學) 중의 하나이다. 천보(天寶) 9년에 국자감(國子監)을 확대하여 광문관이라고 했다.
광문관독동[廣文官獨冬] 두보(杜甫)의 시(詩) 취시가증광문관학사정건(醉時歌贈廣文館學士鄭虔)에 “제공은 곤곤히 대성에 오르는데, 광문 선생의 벼슬만 쓸쓸하구나.[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冬]”에서 나온 말이다. 광문관(廣文館)은 원래 당 칠학(七學) 가운데 하나. 후세는 교관(敎官)을 광문이라 불렀다.
광문관랭[廣文官冷] 두보(杜甫)가 정건(鄭虔)을 광문 선생(廣文先生)이라고 일컬으며 취시가(醉時歌)에서 “광문선생 관직은 유독이나 쌀쌀하다.[廣文先生官獨冷]”라 하였다.
광문냉관[廣文冷官] 광문(廣文)은 당대(唐代) 칠학(七學)의 하나인 광문관(廣文館)이다. 당 나라에서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 한 사람과 조교(助敎) 한 사람을 두어 문사(文士)로 하였다. 두보(杜甫)의 시(詩)에 “광문 선생 혼자서 한직에 남았네.[廣文先生官獨冷]”라는 구절이 있다. 명(明)・청(淸) 때에 교관(敎官)을 광문(廣文)이라 칭하였다.
광문냉료[廣文冷料] 교수(敎授)의 박봉(薄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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