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문도처한무전[廣文到處寒無氈] 당 나라 정건(鄭虔)은 시(詩)・서(書)・화(畵)에 삼절(三絶)이라는 명사였으므로, 국가에서 광문관(廣文館)이라는 관청을 신설하고 정건을 광문학사에 임명하였으나, 봉급이 얼마 되지 않아서 생활이 매우 곤궁하였다. 두자미(杜子美)의 시에 “광문학사는 추워도 담요 하나도 없다.[廣文學士寒無氈]”는 구절이 있다.
광문무전[廣文無氈] 광문(廣文)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인(文人)으로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를 지낸 정건(鄭虔)을 가리키는데, 그는 일찍이 현종의 특별한 배려로 인해 한직(閒職)이나마 광문관 박사가 되었으나, 몹시 빈한한 데다 술을 매우 즐겼으므로, 두보(杜甫)가 일찍이 ‘장난삼아 그에게 준 희간정광문……(戱簡鄭廣文……)’ 시에 “광문이 관사에 당도해서는, 당의 계단 밑에 말을 매 놓았다가, 취하면 말을 타고 그냥 돌아가서, 자못 관장의 꾸지람을 들었네. 재주 명성은 삼십 년을 날렸으되, 빈객은 추워도 앉을 방석이 없네. 다행히도 소 사업이 있어, 때때로 술값을 빌리는구려.[廣文到官舍 繫馬堂階下 醉則騎馬歸 頗遭官長罵 才名三十年 坐客寒無氈 賴有蘇司業 時時乞酒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3> 전하여 후세에는 교관(敎官)을 높여서 광문으로 흔히 일컬었다.
광문박사[廣文博士] 광문박사는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인 정건(鄭虔)을 가리킨다. 현종이 일찍이 광문관(廣文館)을 설치하고 정건을 박사로 삼았는데, 그가 몹시 가난하였으므로 두보(杜甫)가 일찍이 그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희간정광문(戱簡鄭廣文) 시에 “재주 명성은 삼십 년을 날렸으되, 빈객은 추워도 앉을 방석이 없네.[才名三十年 坐客寒無氈]”라고 하였다.
광문빈[廣文貧] 광문은 당(唐) 칠학(七學) 가운데 하나인 광문관(廣文館)을 가리키는 말인데, 후세에는 교관을 광문이라 불렀다. 전하여 광문관 학사를 지낸 정건(鄭虔)을 가리키는데, 그는 두보(杜甫)의 친구로 매우 가난하였다. 두보(杜甫)의 취시가(醉時歌) 시구에 “여러 공들 끊임없이 대성에 오르는데, 광문 선생의 벼슬만 쓸쓸하구나.[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冬]”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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