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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문삼절[廣文三絶]~광문한[廣文寒]~광미반액[廣眉半額]


광문삼절[廣文三絶]  당(唐)의 정건(鄭虔)이 일찍이 광문관(廣文館)의 박사(博士)가 되었기에 그를 일러 광문(廣文)이라고 하는데, 이는 당 명황(唐明皇)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일부러 광문관을 설치하고 그를 박사로 삼았던 것이다. 신당서(新唐書) 문예전(文藝傳) 중(中) 정건(鄭虔)에 “정건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바치자 황제가 찬탄하며 그림 끝에 크게 쓰기를 ‘정건삼절(鄭虔三絶)’이라 하였다.”라 하였는데, 바로 시(詩), 서(書), 화(畫)에 정통한 것을 말한다. <唐書 文藝傳>

광문선생[廣文先生]  당 현종(唐玄宗) 때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를 지낸 정건(鄭虔)을 가리킨다. 광문(廣文)은 두보(杜甫)가 지어 준 정건(鄭虔)의 별호이다. 친구인 두보(杜甫)가 그를 위해 지은 시 ‘취시가(醉時歌)’ 첫머리에 “제공들 뻔질나게 요직(要職)에 오르는데, 광문 선생 벼슬만은 왜 이리도 썰렁한고.[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冷]”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3>

광문선생반부족[廣文先生飯不足]  정건(鄭虔)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인으로 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뛰어나 ‘정건삼절(鄭虔三絶)’로 불린다. 당나라 천보(天寶) 9년(750)에 국자감(國子監)에다 광문관(廣文館)을 증설하여 박사(博士)・조교(助敎)를 두어 국자학생(國子學生) 중에 진사(進士) 시험 준비를 하는 자들을 지도하도록 하였다. 정건(鄭虔)이 일찍이 광문박사(廣文博士)를 맡았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이 한직(閑職)으로 여겼다.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권3 취시가증광문관학사정건(醉時歌贈廣文館學士鄭虔)에 “제공들은 줄지어서 대성으로 가건만 광문 선생 혼자서 한직에 남았었네. 부잣집은 분분하게 성찬도 싫어하는데 광문 선생 혼자만 먹는 것도 부족하네.[諸公袞袞登臺省 廣文先生官獨冷 甲第紛紛厭粱肉 廣文先生飯不足]”라고 하였다.

광문한[廣文寒]  광문(廣文)의 빈한(貧寒).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 정건(鄭虔)은 시서화(詩書畫) 삼절(三絶)로 일컬어질 만큼 재명(才名)이 뛰어났으나 매양 빈궁에 쪼들렸고, 어려서는 종이가 없어서 감나무 잎[柿葉]에다 글씨를 익혔다. <新唐書 卷二百二 鄭虔列傳>

광미반액[廣眉半額]  자신의 주견 없음을 이른다. 후한서(後漢書) 마료전(馬廖傳)에 “성(城) 안에서 높은 머리[高髻]를 좋아하니 사방(四方)이 덩달아 한 자[一尺]나 높아지고, 성안에서 넓은 눈썹[廣眉]을 좋아하니 사방이 덩달아 반 이마[半額]나 차지한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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