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합어오[曠合於奧] 유종원(柳宗元)의 영주용흥사동구기(永州龍興寺東丘記)에 “놀기에 적당한 것이 대개 두 가지가 있다. 넓게 트이고 깊고 그윽한 것이니, 이와 같을 따름이다.[游之適, 大率有二. 曠如也, 奥如也, 如斯而已.]”라고 하였다.
광해주치[光海州治] 춘천(春川)의 신라 때 이름이다.
광헌조황후[光獻曹皇后] 광헌황후는 송나라 인종(仁宗)의 황후로, 조빈(曹彬)의 손녀이다. 시호는 광헌(光獻)이며, 자성광헌후(慈聖光獻后)로 칭해진다. 경우(景祐) 연간에 황후가 되었는데, 성품이 자상하고 검소하였으며, 항상 궁궐 안에서 농사를 짓고 누에를 기르면서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체득하였으며, 비백서(飛白書)를 잘 썼다. 신종(神宗)이 즉위하고는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대해 간하는 말을 올리기도 하였다. 비백서는 서체의 일종으로, 팔분체(八分體)와 비슷한데, 필세(筆勢)가 나는 듯하고 붓 자국이 비로 쓴 자리처럼 보이는 서체를 말한다. 당 태종이 비백서를 쓰자 여러 신하들이 이를 다투어 따라 썼다고 한다. <宋史 卷242 后妃列傳上 慈聖光獻曹皇后>
광협[筐篋] 장방형의 나무상자이다. ‘광(筐)’은 모가 진 대광주리이고, ‘협(篋)’은 상자 또는 장롱을 이른다.
광형[匡衡] 광형은 한(漢) 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치규(稚圭)이다.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면서 공부하였다. 벼슬은 정승에 이르고 낙향후(樂鄕侯)에 봉해졌다. 경의(經義)에 밝았으며 시(詩)를 더욱 잘하였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촛불이 없어 글을 읽을 수 없자 이웃집 벽을 뚫어 새어나오는 불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었다.”라고 하였다.
광형[匡衡] 자는 치규(稚圭)로,한(漢) 나라 때 동해(東海) 승(承) 사람이다. 후창(后蒼)에게 제시(齊詩)를 배우고 시경(詩經)을 잘 해설하였으며,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숭상하였다. 선제(宣帝) 때 태상장고(太常掌故), 평원 문학(平原文學)을 역임하고, 원제(元帝) 때에는 낭중(郎中), 박사(博士), 급사중(給事中), 어사대부(御史大夫) 등을 거쳐 기원전 36년(建昭3)에는 丞相(丞相)이 되었다. 사단(師丹)・복리(伏理)・만창(滿昌) 등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몽구(蒙求上)에 광형이 집이 가난해서 등불을 켤 수 없자 이웃집의 벽에 구멍을 뚫어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 책을 읽었다는 광형착벽(匡衡鑿壁)의 고사가 전한다.
광형[匡衡] 한(漢)나라 선제(宣帝)・원제(元帝)・성제(成帝) 때 사람으로 자는 치규(稚圭)이다. 벼슬은 태자소부(太子少傅)・승상(丞相)에 이르렀다. 낙안후(樂安侯)에 봉해졌다. 경학자(經學者)로서 특히 시(詩)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제유(諸儒)들이 서로 말하기를 “광이 시를 말하면 사람을 아주 재미있게 한다.[匡說詩 解人頤]”고 하였고, 또 광형은 일찍이 성제(成帝)에게 상소(上疏)하여 배필(配匹)을 신중히 세워야 한다는 것을 진술한 적이 있다. <漢書 卷81 匡衡傳>
광형관저[匡衡關雎] 한(漢)나라 동해(東海)의 승(承) 땅 사람으로 시경(詩經)에 해박하여 당시 원제(元帝)에게 상소할 때마다 매번 시경(詩經)의 문구를 인용하여 경계를 삼게 하였다. 원제가 죽고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그는 또 상소하여 후비(后妃)에 대한 경계를 말하면서 시경(詩經)의 관저장(關雎章)을 인용하여 배필의 막중함을 강조하는 한편, 국가의 기강도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아들인 함(咸)도 경문(經文)에 조예가 있어 구경(九卿)을 역임하는 등 그 집안에서 대대로 많은 박사(博士)가 배출되었다. <漢書 卷81 匡衡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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