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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狗封]~구봉[丘封]~구봉[龜峯]~구봉[九峯]


구봉[狗封]  남만(南蠻)의 별칭이다.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 때 견융(犬戎)이 난리를 일으키자, 제곡이 이를 토벌하는 자에게 미녀를 처로 주고 300호(戶)의 땅에 봉해 주겠다고 하였는데, 제곡의 개[狗]인 반호(槃瓠)가 견융의 우두머리를 죽이자, 약속대로 그에게 미녀를 주고 땅을 봉해 주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 구봉씨(狗封氏)의 자손이 후대에 남만의 족속이 되었다고 한다. <藝文類聚 卷94 狗>

구봉[丘封]  분묘의 봉분, 구(丘)는 봉분의 큰 것이요, 봉(封)은 분묘의 작은 것이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의 호이다. 자는 운장(雲長)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성리학 및 예학에 깊은 조예를 이루었다. 김장생(金長生), 정엽(鄭曄), 서성(徐渻) 등의 스승이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을 막후에서 지휘하였다. 원래 노비의 집안이었다가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이 안처겸(安處謙)을 고변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랐는데, 1586년(선조19)에 그것이 조작임이 밝혀져 형제들이 도로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성명을 바꾸고 도피생활을 하다가, 1589년 기축옥사 때 다시 회복되었다. 그 후 조헌(趙憲)의 상소에 관여한 죄로 아우와 함께 희천(煕川)으로 유배되었다가,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이후 벗이나 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선조대의 8문장가로 칭해졌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하였고, 문장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을 위주로 하였다. 저서로는 구봉집(龜峰集)이 있다.

구봉[九峯]  이름은 채침(蔡沈)이고, 자는 중묵(仲默)이며, 구봉은 그의 호이다. 송나라 건주 사람으로, 채원정의 둘째 아들이다. 주희의 제자로, 주희의 명을 받고 서집전(書集傳)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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