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양씨[龜山楊氏] 송나라 유학자 양시(楊時)이다. 이름은 시(時)이고 자는 중립(中立)이니, 이정(二程)의 문인(門人)이다.
구산어록[龜山語錄] 양시(楊時)의 말을 제자들이 기록하여 정리한 것으로, 지금은 구산선생집(龜山先生集) 권10~13에 묶여 있다. 양시는 정문4고제(程門四高弟) 가운데 하나로 자는 중립(中立), 호는 구산(龜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인(仁)을 불교나 도교의 도보다 높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규정하려 하였고, 그로 인해 실천 중심의 호상학파(湖湘學派)로부터 불교에 가깝다 비판받기도 했다. 양시의 학문은 나종언(羅從彦), 이동(李侗)을 거쳐 주자에게로 계승된다.
구산예장연평[龜山豫章延平] 구산(龜山)은 정자(程子)의 문인(門人)으로 학자들 간에 구산 선생으로 일컬어졌던 양시(楊時)를 가리키고, 예장(豫章)은 양시의 문인으로 학자들 간에 예장 선생으로 일컬어졌던 나종언(羅從彦)을 가리키고, 연평(延平)은 나종언의 문인이며 주희가 가장 뒤에 스승으로 섬겼던 인물로, 세상에 연평 선생으로 일컬어졌던 이동(李侗)을 가리키는바, 이는 곧 주희의 학문 연원의 정통이다.
구산왕자교[緱山王子喬] 옛날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인 왕자교(王子喬)가 백학(白鶴)을 타고 승천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일주서(逸周書)에 의하면, 왕자교(王子喬)가 본디 생소(笙簫)를 불어서 봉황(鳳凰)의 울음소리를 잘 냈는데, 그가 일찍이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을 따라 숭고산(嵩高山)에 올라가서 선술(仙術)을 배운 지 30여 년 뒤에 구지산(緱氏山)에서 백학(白鶴)을 타고 승천했다는 고사가 있다. 또 열선전(列仙傳)에 의하면, 왕자교가 일찍이 환량(桓良)이란 사람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에 고하라. 7월 7일에 내가 구지산 꼭대기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告吾家. 七月七日, 待我於緱氏山頭.]”라고 하더니, 과연 그날 왕자교가 백학을 타고 구지산 꼭대기에 머물러 있다가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승천했다고 한다.
구산편호학[緱山鞭皓鶴] 주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 진(晋)이 신선이 되어 후산(緱山)에서 흰 학(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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