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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鉤盾]~구순[寇恂]~구순망미[九旬忘味]~구순안거[九旬安居]


구순[鉤盾]  수서(隋書) 백관지(百官志)에 “사농사(司農寺)는 창시(倉市)와 신채(薪菜), 원지(園池)와 과실(果實)을 관장하며 평준(平準), 태창(太倉), 구순(鉤盾) 등 관서의 영(令)과 승(丞)을 통괄한다. 구순(鉤盾)은 또한 따로 대유(大囿)와 상림(上林), 유렵(遊獵), 시초(柴草), 지수(池藪), 목숙(苜蓿) 등 6부의 승(丞)을 거느린다.”라고 하였다.

구순[寇恂]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는 자익(子翼), 시호는 위(威)이다. 한 광무제를 도와 하내(河內)를 평정하고, 하내 태수(河內太守)・영천 태수(潁川太守)를 지내면서 민심을 얻었다. 뒤에 집금오(執金吾)가 되었다. 구순(寇恂)이 영천(潁川)에서 선정을 베풀고 기한이 차서 떠나게 되자, 백성이 광무제(光武帝)의 행차를 가로막고 말하기를 “원컨대 폐하께서 구군(寇君)을 1년만 더 빌려 주소서.”라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16 寇恂列傳>

구순 광이성세[寇恂 誑以聲勢]  구순이 위풍과 기세로써 속임. 구순(寇恂)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장(名將)이다. 경시제(更始帝)의 장수인 주유(朱鮪)가 광무제가 북방으로 출정하여 하내(河內) 지역의 군사적 대비가 소홀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인 토난장군(討難將軍) 소무(蘇茂)와 부장(副將) 가강(賈彊)으로 하여금 병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하(鞏河)를 건너 온읍(溫邑)을 공격하게 하였다. 당시 구순은 광무제에게 발탁되어 하내를 지키며 병참의 구실을 맡고 있었는데, 적이 공격한다는 격문(檄文)이 이르자, 구순(寇恂)은 즉시 군대를 정돈하여 온읍으로 달려가는 한편, 소속 고을에 병사를 징발하여 온읍으로 보내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군리(軍吏)들은 모두 간하기를 “대군(大軍)이 다 모일 때를 기다려서 출동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구순은 “온읍은 군(郡)의 울타리이다. 온읍을 잃으면 군(郡)을 지킬 수가 없게 된다.” 하고는, 마침내 달려가 아침나절부터 교전하였다. 이때 편장군(偏將軍) 풍이(馮異)가 구원병을 보내고 여러 고을의 병력이 때맞추어 이르러 병마(兵馬)가 사방에서 모이고 기치(旗幟)가 온 들판을 뒤덮었다. 구순(寇恂)은 장병들에게 성(城)으로 기어오르며 “류공(劉公 광무제)의 군대가 도착했다.”고 큰소리로 외치게 하였다. 소무(蘇茂) 군(軍)이 이 소리를 듣고 동요하니, 구순(寇恂)이 이틈을 타 공격하여 적을 대파(大破)하고 추격하여 마침내 가강(賈彊)을 참수하였다. <後漢書 권17 寇恂列傳>

구순망미[九旬忘味]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가 제(齊) 나라에서 소소(蘇韶)를 들어 보고는 대단히 도취되어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고 하였다.

구순안거[九旬安居]  승려들이 여름과 겨울 두 철에 걸쳐서 3개월 동안 한곳에 모여 외출을 금하고 수행하는 제도이다. 음력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한다. 한 안거 기간이 3개월, 즉 90일이므로 구순안거(九旬安居)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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