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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신본[歐陽信本]~구양애소[歐陽愛蘇]~구양영숙[歐陽永叔]


구양신본[歐陽信本]  당 나라 서가(書家)의 사대가(四大家)인 구양순(歐陽詢)은 임상인(臨湘人)인데 수(隋)에 벼슬하여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으며, 당 태종(唐太宗) 때에는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에 이르고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 선서(善書: 글씨를 아주 잘 씀)하여 처음에는 왕희지(王羲之)를 모방했는데 험경(險勁)은 호히려 왕희지를 능가하였다. 그 체를 이름하여 솔경체(率更體)라 하였으며, 그의 아들 통(通)도 선서(善書)하여 소구양(小歐陽)이라 한다.

구양씨[歐陽氏]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를 말한다. 구양수의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歐陽文忠公集)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이며, 금석(金石) 각명(刻銘)을 모아 집고록(集古錄)을 저술하였다.

구양애소[歐陽愛蘇]  구양수(歐陽脩)가 소식(蘇軾)의 재능을 인정한 것이다. 송 인종(宋仁宗) 가우(嘉祐) 2년에 구양수(歐陽脩)는 지공거(知貢擧)로 주시관(主試官)이 되어 모두 388명의 진사를 녹취(錄取)하였는데, 이때 소식도 소철(蘇轍), 증공(曾鞏), 장재(張載) 등과 함께 녹취되었다. 구양수는 뒤에 매요신(梅堯臣)에게 보내는 편지에 “소식의 글을 취하여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땀이 흘렀으니, 장쾌하고 장쾌하다. 노부는 응당 길을 피하여 그에게 한 걸음 뒤로 양보해야 하겠다.[取讀軾書, 不覺汗出, 快哉快哉! 老夫當避路, 放他出一頭地也.]”라고 하였다. <宋史 卷338 蘇軾列傳> 또 소식이 재주와 학식을 겸비했다 하여 구양수는 그를 비각(祕閣)에 추천하였다. <宋史 卷319>

구양영숙[歐陽永叔]  송(宋)나라의 학자 구양수(歐陽脩)로 영숙(永叔)은 그의 자(字)이다.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며, 추밀부사(樞密府使)・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군서(群書)에 널리 통하고 시문(詩文)으로 유명하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조정에 있으면서 한기(韓琦)와 함께 정사에 힘쓰다가 여러 소인배의 모함을 받자, 만년에는 조정에서 물러나기를 힘껏 구하였다. 저서로는 신당서(新唐書)・신오대사(新五代史), 기타 시문집(詩文集) 등이 있다. <宋史 卷319 歐陽脩列傳>

구양영숙[歐陽永叔]  영숙은 송(宋)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의 자(字)이다. 그는 일찍이 신당서(新唐書)를 찬했는데, 여기에 측천무후를 당기(唐紀)에 그대로 넣었다. 이는 한 혜제(漢惠帝)가 죽은 다음, 여후(呂后)가 직접 정치를 했는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여후기(呂后紀)가 있는 것을 따른 것이다.

구양영숙모군기[歐陽永叔冒羣譏]  구양영숙은 송나라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를 가리킨다. 영숙은 그의 자이다. 당시 송나라의 독서인들은 신기하고 기괴한 문체를 좋아하였는데 이러한 문체를 태학체(太學體)라고 불렀다. 가우(嘉祐) 2년(1057) 구양수가 시험을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을 때 이러한 문체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들을 모두 탈락시키자, 시험에 탈락한 사람들은 구양수를 비난하고 욕하였지만 이후 과거 시험의 문풍이 크게 달라졌다. 구양수는 내용 없이 수사만을 일삼는 풍조를 배격하고 고문(古文)을 제창하여 송대의 문풍 혁신을 선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宋史 卷319 歐陽脩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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