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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록[九疑麓]~구의미생[摳衣彌甥]~구의봉[九疑峯]~구의산[九疑山]


구의경기탁[舊衣經幾濯]  임금은 옷을 새 것만 입고 다시 빨아 입지 않았는데, 검소한 임금은 헌 옷을 빨아 입은 이가 있었다. 고려 후기의 문신인 김양경(金良鏡)의 시 서대관전보좌후장무일도상(書大觀殿黼座後障無逸圖上)에 “노가 무거우니 노마의 달림이 더디고, 하늘이 높아서 학의 그리움이 길다. 헌 옷을 몇 번이나 빨았던고. 오히려 어로의 향로를 머금었네.[輅重駑馳短 天高鶴戀長 舊衣經幾濯 猶帶御爐香]”라고 보인다.

구의록[九疑麓]  유종원(柳宗元)의 고연주원외사마능군권조지(故連州員外司馬凌君權厝誌)에 “멀쩡한 몸 치욕을 당해 오강 가에 폄적이 되고, 구의산 밑 강등된 뒤에 변고 재앙 꼬리를 물어 이 참혹한 일을 만났네. 자기 운명 능히 알아서 원한이야 없다고 해도, 죄목 아니 지워졌기에 죽더라도 치욕은 여전하네.[身則辱 烏江垂 九疑麓 仍禍凶 遘玆酷 能知命 無怨毒 罪不泯 死猶僇]”라고 하였다. 구의(九疑)는 지금의 호남(湖南) 영원현(寧遠縣)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당(唐)나라 때 연주(連州) 경내에 있었다. 능준(凌準)이 연주사마(連州司馬)로 강등되어 폄적되었으므로 한 말이다.

구의미생[摳衣彌甥]  공손한 태도의 먼 외손을 말한다. 구의(摳衣)는 옷자락을 추어올린다는 뜻으로, 어른 앞에서 몸가짐을 공손히 하는 태도로서, 역시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옷자락을 추어올리고 구석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가서 앉고, 반드시 응대를 삼가서 해야 한다.[摳衣趨隅 必愼唯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미생(彌甥)은 먼 외손이다.

구의봉[九疑峯]  세상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달라서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음을 뜻한다. 이백(李白)의 공후요(箜謠) 시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 사이엔, 산과 바다가 그 몇 천 겹이던고. 친구로 사귀자고 선뜻 말하지만, 얼굴 마주하면 구의봉처럼 멀다네.[他人方寸間 山海幾千重 輕言託朋友 對面九疑峯]”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구의봉[九疑峯]  중국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 남부에 있는 구의산의 봉우리를 이른다. 주명(朱明)・석성(石城)・석루(石樓)・아황(娥皇)・순원(舜源)・여영(女英)・소소(簫韶)・계림(桂林)・자림(梓林) 도합 9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9개의 봉우리가 거의 같아서 이것인지 저것인지 의심스럽다는 뜻에서 ‘구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순 임금의 사당이 있다. <水經 湘水註>

구의산[九疑山]  구의산은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산으로, 창오산(蒼梧山)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순(舜)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죽어 이곳 기슭에 묻혔으므로, 후대에는 임금을 장사 지낸 장소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순 임금이 제위에 오른 지 39년 되던 해에 천하를 순수하다가 창오(蒼梧)의 들판에서 붕어하니, 강남의 구의산에 장례 지냈다.[踐帝位三十九年, 南巡狩, 崩於蒼梧之野, 葬於江南九疑.]”라고 보인다.

구의산[九疑山]  구의산은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 남쪽에 있는 주명(朱明)・석성(石城)・석루(石樓)・아황(娥皇)・순원(舜源)・여영(女英)・소소(蕭韶)・계림(桂林)・재림(梓林) 등 아홉 봉우리의 산으로 모두가 모양이 같이 생겨서 보는 사람이 누구나 어느 봉이 어느 봉인지 어리둥절하여 의심을 내게 되므로 구의(九疑)라 이름하였다 한다. 일명 창오산(蒼梧山)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순(舜) 임금의 무덤이 있다 하며 옆에 소상강이 있다. 순 임금은 순행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죽었는데, 그의 이비(二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은 소상강을 건너지 못하여 남편의 시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슬피 울다가 그만 빠져 죽고 말았다 한다.

구의산[九疑山]  순(舜) 임금을 장사 지낸 곳이다. 창오(蒼梧)의 들에 있다고 알려졌는데, 현재의 중국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의 남쪽이다. 주명(朱明)・석성(石城)・석루(石樓)・아황(娥皇)・순원(舜源)・여영(女英)・소소(蕭韶)・계림(桂林)・재림(梓林)의 아홉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모양이 같아 보는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켜 구의(九疑)라고 말한다. 사기(史記)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순이 제위(帝位)에 오른 지 39년에 남쪽으로 순수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여 강남(江南) 구의(九疑)에 장사 지냈으니, 이것이 영릉(零陵)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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