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毬庭] 구정은 일반적으로 구장(球場)과 같이 궁중(宮中)이나 부호(富豪)・귀족(貴族)들의 집안에 있었던 격구(擊毬)를 하는 크고 넓은 마당을 이른다. 고려 때에는 격구가 성행하여 구정을 둔 집이 많았다. 격구는 장(杖)으로 공을 쳐서 우열을 겨루는 무술 또는 유희로서, 고려 시대 때부터 있었다.
구정[舊情] 옛 정. 살았을 때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했던 마음.
구정[丘井] 옛날의 토지법이다. 고대 토지 제도에서 면적의 단위로, 1구(丘)는 16정(井)이고 1정은 900묘(畝)이다.
구정[九井] 지금의 무안군(務安郡) 일로읍(一老邑) 구정리(九井里)를 말하는 것으로, 마을에 9개의 우물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정[九井] 은(殷)나라 기자(箕子)가 평양에 와서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 제도는 1리(里 사방(四方) 900묘(畝))의 토지를 9구(區)로 획정(劃定)하여, 1구(區)를 100묘로 하되 그 중앙에는 공전(公田)을 만들고, 이외의 것은 여덟 집에서 각각 1묘씩 맡아 농사를 짓게 하였으며, 공전(公田)은 공동으로 경작하고 그 대신 사전(私田)에는 면세하게 하였다.
구정거이[九鼎遽移]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국권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春秋時代) 때 초(楚)나라가 육혼(陸渾)에 있는 군대를 공격하면서 주(周)나라의 국경에서 사열식을 하였는데, 그때 주나라를 취할 뜻이 있어서 우(禹) 임금이 제작했다는 구정(九鼎)의 대소경중(大小輕重)에 대해 물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3年>
구정대려[九鼎大呂] 모두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보기(寶器)이다. 구정(九鼎)은 하(夏)나라 우(禹) 임금이 만든 아홉 개의 솥으로 천자를 상징하며, 고대에 국가의 정권을 상징하는 기물로서 나라를 전하는 보물이다. 사기(史記) 권12 효무본기(孝武本紀)에 “우(禹) 임금이 구주(九州)의 쇠를 거두어 구정을 만들었는데, 이는 구주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려(大呂)는 주(周)나라 종묘(宗廟)에서 사용하던 큰 종(鐘)이다. 사기(史記) 권76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에 “모 선생(毛先生)이 한번 초(楚)나라에 이르자 조(趙)나라를 구정과 대려처럼 귀중하게 만들었다.[毛先生一至楚 而使趙重於九鼎大呂]”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대려는 주(周)나라 종묘의 큰 종이다.”라고 하였다.
구정대려[九鼎大呂] 구정은 하(夏)나라 우(禹) 임금이 주조한 아홉 개의 솥으로 천자를 상징하며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에 걸쳐 서로 전하여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며, 매우 무거운 것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대려는 주(周)나라 종묘(宗廟)에서 사용하던 큰 종(鐘)으로 그 또한 중량이 매우 많이 나갔다. 모두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보기(寶器)이다. 전국 시대 때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이 모수(毛遂)를 데리고 초왕(楚王)과 교섭하러 갔는데, 초왕에게 합종(合縱)의 이해(利害)를 말하였으나 한나절이 다 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모수가 칼을 빼 들고 단상으로 뛰어올라 가 초왕을 위협해서 드디어 합종에 대한 약속을 받아 냈다. 평원군이 말하기를 “조나라를 구정이나 대려보다도 중하게 만들었다.[而使趙重於九鼎大呂]” 하였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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