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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산수극[屈産垂棘]~굴산지승[屈産之乘]~굴상백피[掘桑白皮]


굴산[屈産]  좌전(左傳)과 곡량전(穀梁傳) 주에는, 굴(屈)은 고을 이름이요, 산(産)은 말을 산출하는 것이라 하였고, 공양전(公羊傳) 주에는 굴산(屈産)은 땅 이름인데 명마를 산출하는 땅이라 하였다.

굴산[堀山]  기사굴산(耆闍堀山)의 약칭이다. 취봉산(鷲峯山) 또는 영취산(靈鷲山)으로 번역한다.

굴산수극[屈産垂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년에 굴산의 말과 수극(垂棘)의 옥을 우(虞)나라에게 주고 길을 빌려 괵(虢)을 치는 기사에서 처음 나오는데, 굴(屈)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지명으로 명마(名馬)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고, 수극도 진(晉)나라의 지명으로 미옥(美玉)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후에는 명마와 미옥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굴산지승 수극지벽[屈産之乘 垂棘之璧]  굴산(屈産)의 말과 수극(垂棘)의 벽옥.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년에 굴산의 말과 수극(垂棘)의 옥을 우(虞)나라에게 주고 길을 빌려 괵(虢)을 치는 기사에서 처음 나오는데, 굴(屈)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지명으로 명마(名馬)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고, 수극도 진(晉)나라의 지명으로 미옥(美玉)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후에는 명마와 미옥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굴산지승[屈産之乘]  굴산(屈産)은 좌전(左傳)과 곡량전(穀梁傳) 주(註)에는, 굴(屈)은 고을 이름이요, 산(産)은 말을 산출하는 것이라 하였고, 공양전(公羊傳) 주(註)에는 굴산(屈産)은 땅 이름인데 명마를 산출하는 땅이라 하였다. 굴(屈)을 지명으로 보면 굴성(屈城)이 그곳인데,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석루(石樓) 동북쪽으로 진(晉) 공자(公子) 이오(夷吾)가 지키던 곳이다. 굴산(屈産)은 지금의 산서성 석루 동남쪽으로 아직 굴산천(屈産泉)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명마의 생산지는 대체로 후자로 본다.

굴상[掘桑]  굴상백피(掘桑白皮)의 준말로, 동(銅) 칼로 뽕나무 뿌리의 얇은 황청색 껍질을 벗겨 내 버리고 하얀 속껍질을 채취함을 이른다. 이렇게 하여 만든 상백피는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伊洛淵源錄 卷3>

굴상백피[掘桑白皮]  동(銅) 칼로 뽕나무 뿌리의 얇은 황청색 껍질을 벗겨 내 버리고 하얀 속껍질을 채취함을 이른다. 이렇게 하여 만든 상백피(桑白皮)는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伊洛淵源錄 卷3>

굴생함함[屈生顑頷]  굴생(屈生)은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키며, 함함(顑頷)은 굶주림 때문에 낯빛이 누렇게 뜨고 여윈 모습이다. 굴원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진실로 내 마음 성실하고 정결하다면, 오랫동안 굶주려 누렇게 뜬들 어찌 나쁘겠는가.[苟余情其信姱以練要兮 長顑頷亦何傷]”라고 하였는데, 홍흥조(洪興祖)의 보주(補注)에 “함함은 배불리 먹지 못해서 낯빛이 누렇게 뜬 모습이다.[顑頷 食不飽 面黃貌]”라고 하였다.

굴서[屈署]  초(楚)나라의 신하이다. <戰國策 楚策 四>

굴서[掘鼠]  한 무제(漢武帝) 때의 절신(節臣) 소무(蘇武)가 당시 중랑장(中郞將)으로서 흉노(匈奴)에게 사신 갔는데, 그만 19년 동안 흉노에게 잡히어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절개를 지켰다. 특히, 북해(北海) 근방으로 이동되어 양(羊)을 쳤는데, 양식이 없어 들쥐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漢書 卷54 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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