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
홀어머니 뵈러 시골갈 때 청양 시외버스 정류장 주유소 옆댕이 대우식육점에 쇠고기 한 근 사러 갔더니 동창생 효식이가 소곡주 한 컵…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물 한 방울 없고…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 우선 텃밭…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신혼이라 첫날 밤에도 내 줄 방이 없어 어머니는 모른 척 밤마실 가고 – 붉은 살집 아들과 속살 고운 며느리가 살…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남 모르게 가만히 먹어 봤다오 –…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여수발 서울행 밤 열한시 반 비둘기호 말이 좋아 비둘기호 삼등열차 아수라장 같은 통로 바닥에서 고개를 들며 젊은 여인이 내게 물었다…
고요도 씻길대로 씻긴 새벽녘 우리 고향 섬진강이 지리산 마루턱을 향해 기어오르다 겨우 그 허리를 한번 껴안고는 크나큰 숨결로 쏟아져 내리듯이…